그림論 - (6) 우리 사회의 현주소

글쓴이
abydos
등록일
2004-04-29 14:30
조회
4,687회
추천
7건
댓글
1건
글 쓰는 게 힘들기는 힘든가 봅니다.

지난 한 2주일간 파김치가 되어 있습니다.

또 앞에서도 말했지만,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상담 수가 평소의 1/3에 가까울 정도로
줄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6부에 이어
화요일이나 수요일 7부가 마무리됩니다.

그래서인지
지난 며칠 사이에 상담은 다시 거의 모든 시간이
예약되었습니다.

마음에 맡기면 모든 것은 순리대로 됩니다.


6부 우리 사회의 현주소입니다.

어느 구석 병들고 썩지 않은 곳이 없지만,
모두를 들칠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입니다.

다음의 순서대로 적겠습니다.

(1) 양육(養育)과 교육(敎育)
(2) 부부(夫婦) 문제, 남녀 문제
(3) 효(孝), 장유유서(長幼有序)와 호칭 문제
(4) 투자(投資)와 투기(投機)
(5) 술, 섹스 그리고 '꿈 ★ 은 이루어진다'


모든 소제목들이 각각 책 한 권을 이룰 정도로
간단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여기서는 '원리'에 준해 간단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 양육(養育)과 교육(敎育)

양육과 교육.
이것만이라도 바로 세워지게 된다면
위의 여러 소제목의 문제들은 모두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대치동에 개업한 지 10년 째.
1년 전 정부에서는 상가임대차보호법인가 하는 것을
만들어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임대인의 횡포로부터 세입자를 보호하겠다는
건전한 의도로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시행과정에서 거의 모든 임대인들은
앞으로 5년간 임대료가 묶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임대료를 심하게는 3배 이상도 올렸습니다.

상가임대차보호법이 어느 금액 이상일 경우에는
이 법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도 그 이유가 됐습니다.

아직 전세를 살고는 있지만,
그 동안 임대해서 8년간 병원을 운영하는데
그리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IMF가 닥쳤을 때,
주인은 임대료를 한 동안 인하해 주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법이 발표되면서
주인은 임대료를 두 배 반이나 올렸습니다.

이 상황에서 나는 전공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경제' 분야에 대해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앞에 설명한 것과 같이
우리 사회가 분노의 시대로 들어섰다는 것을 본 나로서는
우리 사회가 더 이상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이해했고,

일단 주인의 요구대로 재계약을 했지만,
계약 기간은 법의 보호를 받는 5년이 아니라
1년으로 하였습니다.

분노의 시대로 접어든 우리 사회의 향후 경제적 상황은
점차 악화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내용이 현실화되었습니다.
IMF 때 가격이 폭락한 많은 건물들을 사들였던
외국의 자본가들이 다시 건물들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또 경기가 악화되면서 속속 비는 상가와 사무실들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지난 연말 계약기간이 다가와 주인에게 연락을 했고,
임대료를 하향조정해줄 수 있는지 의향을 물었습니다.

주인의 대답은 'No!'였습니다.


필요 없이 서론이 길어진 이유는 이렇습니다.

주인이 이러한 내 제안을 거부한 이유는,
바로 대치동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앞서가는
과외와 학원의 1번지였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의도였습니다.

'싫으면 나가라.
학원으로 임대하면 언제든지 더 비싼 임대료를 받을 수 있다.'


바로 학원 문제를 얘기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미 공교육이 무너졌느니, 사교육 때문에 나라가 망하느니
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땅 위에 사는 그 어느 누구도
교육이 무엇이고 또 양육의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평생을
'나는 내가 아니에요'만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양육자와 피양육자, 또한 모든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오로지 한 가지
'나는 내가 아니에요'만을 하면서 평생을 살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교육에 문제가 있음을 피부로 느껴서
수도 없이 제도를 바꾸었지만
아무리 이런 노력을 되풀이해도 전혀 나아지는 것이 없습니다.

교육과 양육을 맡은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끝없이 어떻게 해야 '나는 내가 아니에요'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것만이 사는 이유이자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육과 교육의 정의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모든 진리는 간단한 것입니다.

양육과 교육의 정의는,
'자신감, 신뢰 그리고 사랑을 훈련하는 과정'입니다.


건강한 부모로부터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넌 이런 아이로구나'

있는 그대로의 아이로서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감과 동시에 신뢰를 알게 됩니다.
동시에 나를 사랑하는 것과 남을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그러한 사람으로서 평생을 살게 됩니다.

자신감과 신뢰 그리고 사랑은
어느 한 순간의 입장이 아닙니다.

한 번 생기면 바로 그러한 사람으로 평생을 살게 되는
평생에 걸쳐 변치 않는 '태도'입니다.

세상에 태어나 부모와의 사이에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와의 사이에서
이러한 건강한 태도를 성공적으로 갖추게 된 아이는

점차 크면서 자기 자신은 물론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호기심과 관심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을 이끌어주는 것이 양육입니다.

물론 아이는 아직 세상의 기본 이치를 알지 못합니다.
호기심에 의해 차들이 달리는 큰 길에 들어가려고도 합니다.

이런 아이를 보호하는 것이 부모의 의무이자
또 이런 과정이 양육입니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또한 가능하다면
아이의 모든 호기심을 스스로 탐험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양육이고,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아이의 안전을 보호해주는 것이 양육입니다.

아이가 점차 크고 나이를 먹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이의 호기심과 관심은 더욱 넓어져서
부모가 집에서 또는 근처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충족시켜주는 것이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됩니다.

또한 집 안에는 없지만 세상 속에는 아이가 호기심과 관심을 느낄
수많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경험한 부모는
아이로 하여금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도록
앞으로 평생을 살게될 세상을 배우도록 아이를 넓은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그래서 보내는 곳이 학교입니다.

아이의 호기심과 관심을 충족시키는 과정이 양육이듯이,
더 커지고 넓어진 아이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똑같은 과정을 더 넓은 곳으로 옮겨서 하는 곳이 바로
학교입니다.

국어, 산수, 사회, 자연, 음악, 미술 그리고 체육.
이 넓은 영역에서의 아이의 호기심과 관심을
한 가정에서 부모가 모두 경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모든 부모가 이런 여러 영역을 전공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과정을 전공한 전문가들에게
아이가 이러한 과정을 훈련하는 것을 돕도록 위임하는 것입니다.

교육의 정의 역시
자신감과 신뢰 그리고 사랑을 훈련하는 과정입니다.

이미 그러한 태도는 엄마와의 관계를 통해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사람인지,
또 세상에는 나와는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고
또한 어떤 면에서는 어떻게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한 가정에서 다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더 많은 경우의 수 안에서 나를 보고 남을 보면서
내가 더 정확히 어떠한 사람이고

나와 같이 하는 다른 사람들은 더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각각 있는 그대로를 보고 받아들이는
자신감과 신뢰를 더욱 구체적으로 훈련하는 과정이
바로 교육과정입니다.

양육과 교육은 같은 과정입니다.

모든 부모가 세상의 모든 영역을 모두 담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모두 맡을 수는 없는 양육의 다른 부분을
각각 해당하는 전문가들에게 위임하여 이루어지는 과정이 교육입니다.


이러한 양육과 교육과정은
또 이러한 과정을 부모와 교사가 도와주는 과정은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로 한정됩니다.

이 때까지는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어 성인이 되어 이제는 부모나 교사들로부터 독립한 사람은
이렇게 지난 20년간 성인이 되기까지 끊임없이 훈련했던
자신감과 신뢰 그리고 사랑을
이제는 혼자서 실천하고 수행하게 됩니다.

또한 죽는 날까지,
이제는 혼자서 스스로 하는 것이지만
'나'의 있는 그대로를 알고자 하는 과정이나
내 주위의 다른 '너'에 대해 끝없이 알고자 하는 과정은 지속됩니다.

한 사람은 하나의 작은 우주입니다.

대략 어느 기간을 알고자 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 그 날까지
자신감, 신뢰 그리고 사랑의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바로 그 자체로 인생의 목적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수단으로 하는 그 어떤 다른 목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육과 교육과정이 부모와 교사들에 의해 안내되는
성장과정을 마치면서 아이가 확인해야 하는 과제는

바로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그래서 바로 그러한 자신이 이 사회 안에서

평생 동안 아니면 사회적 상황이 획기적으로 바뀔 때까지 맡게 될
사회 안에서의 역할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즉 직업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집에서 양육과정이 진행되고
또 학교를 계속 다니면서 나를 더욱 잘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결과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길거나 또는 짧거나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또한 계속해서 자신에 대해 더 정확히 알고자 도전합니다.

그래서 이제 성인기를 맞게 되면서,
이 사람은 자신이 지난 20년에 걸쳐 알아왔던 자신과
또한 이런 자신의 특징과 가장 어울리는 사회 안에서의 역할을 비교하고
자신이 이 사회 안에서 수행하게 될 직업을 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작은 일이거나 큰일이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이미 성장과정에서 나와 비슷하거나 또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고,
이러한 서로의 차이를 아무런 저항이나 이질감 없이
받아들여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양육과정이고 또 교육과정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어떨까요.

한 마디로 우리 사회의 모든 양육과 교육의 목표와 목적은
'나는 내가 아니에요'입니다.

우선 부모는 자신들이 평생 해왔던
'나는 내가 아니에요'를 이루려고 합니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내가 아니에요'라는 것은 결코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이루지 못한 자신의 목적을
이제는 아이들을 통해 다시 이루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나는 내가 아닌데, 이런 저런 이유나 핑계 때문 이었다'고 주장한 것을
입증하게 되는 것이고,

바로 자신이 심은 결과가 콩인 것을 입증함으로써
바로 자기 자신이 콩임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부모는 아이들에게
'이래야 한다'거나 또는 '저래야 한다'고 끝없이 강요합니다.

또한 끝없이 '너는 너가 아니어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너는 다른 아이들보다 무조건 잘해야 하고,
또 이겨야한다고 강요합니다.

자신이 '나는 내가 아니에요' 라고 주장하기 위해 만든
우월감의 모습대로 되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강요합니다.

남보다 더 잘나야 하고,
항상 이겨야 하고,
앞서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이러한 부모의 강요를 당연히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성장과정 내내 '나는 내가 아니에요'만을 계속합니다.


부모가 아이를 학교로 보내는 이유나 목적 또한
넓은 세상으로 나가 그 넓은 세상에서
자신감과 신뢰 그리고 사랑을 더욱 경험하라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바로 그들과 싸워 반드시 이겨야하는
그러한 전장이자 지옥 속으로 아이들을 내모는 것입니다.

목적은 한 가지입니다.

반드시 남보다 앞서는 것이고 또 이기는 것입니다.


교육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교육을 맡은 이 땅의 모든 교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감과 신뢰 그리고 사랑 따위는 알지도 못하고
또 아무런 의미나 가치도 없습니다.

교육이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남보다 더 잘나고 더 앞서도록
또 남을 어떻게 해서라도 이길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사들이 나름대로 스스로 노력하는 모든 이유 역시
이런 일을 함으로써
바로 자기 스스로가 평생 해오고 있는
'나는 내가 아니에요'를 오로지 이루려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 교사들에게 아이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는 아무런 쓸모도 가치도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많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더욱이 아무리 해도 되지 않을 그런 애들까지
참고 지도하는 그런 괜찮은 사람'임을 입증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교사에게 자신의 애쓰는 교육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오르지않는 학생들은
'반 평균을 깎아 먹는 버러지'에 불과합니다.


다시 사진을 보겠습니다.
전에 올렸던 사진A입니다.

사진A



이 땅의 모든 병든 양육과 교육은 바로 이 사진과 같습니다.

어린 나무로 하여금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산의 정상 쪽으로 올라가라고 끝없이 강요합니다.

'나는 내가 아니에요'를 평생 하도록 강요합니다.

결국 모든 아이들을 미친 아이로 만들게 됩니다.
아이는 끝없이 허리에 힘을 주다가 여러 가지 병을 얻게 되고
소수는 결국 뿌리가 뽑혀 죽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택하는 아이의 마음을 부모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노력을 기울인 아이가 죽어서
이제는 더 이상 '나는 내가 아니에요'를 할 수 없게 된
자신이 처량할 뿐입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다시 사진B입니다.

사진B



나무는 나무입니다.
그리고 이 나무는 바로 이런 나무입니다.

이 나무가 이런 나무인 것은
바로 그 자체로 이 나무가 세상에 나온 이유이자 목적입니다.

제아무리 발광을 한다고 해도,
이 나무는 정상 쪽으로 단 한 치도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또한 나무의 할 일은
정상 쪽(사진의 왼 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하늘(사진의 윗 쪽)을 향해 자라는 것입니다.

양육과 교육의 정의 또한
이 어린 나무로 하여금
자신이 자랄 수 있는 만큼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뜻합니다.


나는 나 이상도 나 이하도 아닙니다.
아무리 기를 쓴다 해도 나 이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내가 나인 것 그 자체가 이미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누구나 열심히 하면 다 서울대를 들어갈 수 있다.'

맞는 말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제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매년 서울대를 들어가는 사람은
전체 수험생 중에서 상위 3,000명만이 가능합니다.

물론 모든 수험생이 건강한 조건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는 전제에서입니다.

하지만 일부러 최선을 다하지 않는 수험생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현재 횡행하고 있는
모든 학원과 고액 과외, 족집게 과외가 낳은 결과는
수준이 안 되는 적지 않은 아이들로 하여금
이런 병적이고 편법적인 방법을 통해 서울대를 들어가게 함으로써

올바른 경쟁을 했다면 자기 자리를 찾았을 수 있는
그런 학생들의 자리를 뺏은 것에 불과합니다.

다들 들으셨겠지만,
대학의 입장에서 보면 신입생들 중에는 대학교육을 받아들일 수 없는
학생들이 적지 않아
이제는 대학 자체에서 다시 과외를 해야 할 형편이라고 합니다.

나는 나입니다.

이것 하나만 깨닫는다면 우리 사회는 바로 서게 됩니다.




(2) 부부(夫婦) 문제, 남녀 문제

소제목 (1)이 길어졌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부부 문제와 남녀 문제입니다.
짧게 가겠습니다.


사랑 받지 못한 모든 남녀가 결혼을 하면서 상대에게 기대하는 것은
모두 똑같습니다.

이 땅의 모든 남편은
첫 째, 아내에게서 자신이 실패한 환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엄마의 사랑'을 기대합니다.

둘 째, 당연히 남자로서 여자보다 앞서고
또 여자를 이겨야 한다고 기대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아내들은
남편에게 환상 속에나 존재하는 '아빠의 사랑'을 기대하는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 남자에게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을 기대합니다.

이 모든 기대가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엄마를 기대한다면 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마찬가지로 아빠를 기대한다면 지지 않을 것 또한 포기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간혹 연상의 여자와 결혼하는 부부는
상대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기도 합니다.

즉 한 쪽은 엄마를 원하는 대신, 이기는 것을 포기한 것이고,
다른 한 쪽은 이기는 것을 위해 아빠를 포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부부 역시 결코 건강한 부부는 아닙니다.


이렇게 엄마를 기대하고 아빠를 기대한
모든 남편과 아내들은 반드시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는 분노합니다.

이럴 경우 남자가 찾는 것이 '다른 여자'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불륜과 성문제가 파생됩니다.

여자의 경우는 아이들에게서 이루지 못한 소원을 이루려고 매달리기도 하고,
더 이상 현실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
환상 속의 '아버지'를 찾기도 합니다.

또한 대략 10년 전부터 이 사회의 여자들 또한
다른 남자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름하여 '애인'입니다.

대략 10년 전 한 월간지에 '강남 주부의 30%가 애인을 만나고 있다'는
내용이 보도되면서 삽시간에 이런 병적인 풍조는
전국에 퍼졌습니다.

9년 전, 이 자리에 개업한 직후
부부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애인이 바람을 피운다며
우울증에 걸려 온 유부녀와 유부남들을 보면서
우선 황당함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과도기적 현상에 불과했습니다.

이후로 이런 일은 별로 없습니다.

'애인'의 경우, 부부와는 달리 별로 마찰이 없습니다.
서로 이러한 동기로 만나기 때문이고
그래서 어떤 부분을 서로 넘지만 않는다면
다시 말해 자신의 배우자에게 기대한 그대로를 다시 기대하지만 않는다면
별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래의 속성 상,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의 요구 또한
들어주는 척해야 하고,
그렇게만 한다면 다른 문제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 건강한 부부는 없습니다.
개중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화목한 부부로 인정받는 부부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 역시 두 가지의 동기 중에 서로 하나씩을 양보하면서
그런대로 거래가 마찰 없이 성사된 경우에 불과합니다.

즉 엄마를 얻기 위해 이기는 것을 포기한 남자와
반대로 이기는 것을 위해 아빠를 포기한 경우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 역시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성숙하고 건강한 부부는 아닙니다.


부부의 정의는 간단합니다.
남편과 여편이 한 편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 상대에게 '나는 내가 아니에요'를 하기 위한 그 어떠한 기대도 없습니다.
그래서 실망 또한 없습니다.

또한 부부는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 중에서 자신과 공명(共鳴, Resonance)을 일으키는
이성을 발견하게 되면,
'나는 이 사람을 앞으로 사랑할 것이다'라는 결정을 하는 것이고,
이어 죽는 날까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거슬리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 배우자의 문제가 아니라
거울에 비친 바로 내 모습인 것을 끝없이 발견하고 또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공명(共鳴)을 일으켜 만나게 된 것입니다.

내 배우자 역시 나라는 거울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또 깨달아 갑니다.

이게 부부입니다.


남녀 문제 역시 간단합니다.

이 땅의 모든 남자는 여자에게 절대로 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바로 '나는 나예요'가 되는 것이고,
남자로서 아무런 쓸모도 가치도 없는 놈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든 남자에게 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역시 '나는 나예요'가 되면서
여자는 남자를 이길 수 없는 존재로서
어려서부터 그런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결국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어라 싸웁니다.

정말로 불쌍들하고 한 편 한심들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적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이런 있지도 않은 병적인 것을 만들어
물려준 병든 부모들 때문입니다.

그리고 800년 전, 여자와 아이들을 버리고
저만 살겠다고 강화도로 도망간
그 남자들 때문입니다.

내가 남자이고 또 내가 여자인 것은
그 누구 때문도 아니고,
또한 그러한 것이 서로 다른 성별로 하여금 평생 적을 만들
그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못나고 병든 부모들 때문이고, 못나고 병든 조상들 때문입니다.

나는 그냥 나입니다.
또한 나는 그냥 남자이거나 그냥 여자입니다.

누가 이기는 것도 또한 누가 지는 것도 없습니다.

서로는 한 인생을 사는데
서로로서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동반자이고 또 거울입니다.

그런데 800년간 죽어라 싸우고만 있습니다.


나는 나입니다.
또한 너는 너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모든 전쟁은 끝나게 됩니다.




(3) 효(孝), 장유유서(長幼有序)와 호칭 문제

짧게 가겠습니다.

위에 적은대로 여자와 아이들을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간 남자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어떻게든 자신의 입지를 지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자나 아이들 모두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 같습니다.
쪽팔리고 체면이 서질 않습니다.

이 때 수입한 것이 바로 효(孝)입니다.

이 孝와 더불어 강요한 칠거지악이
이후 800년 동안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을
미친 자녀로 만들었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양육하고 또 때가 되면 독립시키는 것은
모든 인간과 또한 모든 생명체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당연한 의무를 했다고 해서
그 누구한테라도 상을 받거나
또한 그 어떠한 대가를 요구할 문제도 결코 아닙니다.

사랑을 아는 건강한 사람이라면
그 어떠한 조건도 없이 기꺼이 수행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가장 신성한 의무일 뿐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효를 강요할 필요도 또한
그러한 효를 따라할 필요도 없습니다.

효라는 것은 사랑이 없는 상황에서
단지 자신들의 이익을 구하기 위해 부모가 강요한 것에 불과하고,
또한 이런 사랑이 없는 부모에게서
있지도 않는 사랑을 얻어 보겠다고 끝없이 따라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孝를 만든 중국보다 그리고 그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동양의 다른 어떠한 나라들보다,

그리고 지구상에서 가장 孝를 강요하고
또 가장 절절하게 따라하는 나라가 바로 우리 사회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우리 사회가 존속폭행이나 존속살인에서
세계의 수위를 달립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효를 강요하는 것은
끝까지 아이들을 어린 아이의 상태로 잡아두는 게 목적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성장하고 독립을 하게 되면
이제는 동등한 성인으로서
이제는 성인이 된 아이들로부터 객관적인 비판이나
심지어는 공격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효를 강요한 결과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성인 나이가 지나도 나는 늘 누구의 아들이거나 딸일 뿐입니다.

부모가 죽은 후에도 역시 나는 누구의 아들이거나 딸로서
내가 죽는 그날까지 아들이거나 딸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이게 孝입니다.


이런 孝가 파생시킨 다른 병적인 것이 바로 장유유서입니다.

孝로서 부모와 자식은 확고한 선이 그어집니다.
범접할 수도 없고 넘나볼 수도 없습니다.

이런 孝가 다시 만든 것이 장유유서입니다.

생각은 나름대로 공정해야 하고
또한 스스로의 모순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같은 형제 안에서도 서로 범접할 수 없는 위계가 형성됩니다.

모든 아이들을 죽는 날까지 아이의 상태로 머물게 한 것이 孝라는 것과
또한 이러한 효가 더불어 장유유서를 낳았다는 것이 합쳐집니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어린 아이로서
위와 아래의 위계에서 살다가 갑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흔한 한 단면을 보겠습니다.

남자이건 여자이건 처음 만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가장 먼저 파악하는 게 서로의 나이입니다.

그리고는 순간 위와 아래가 결정됩니다.
그리고 이후로 이들은 죽는 날까지
그리고 죽은 후에까지 그 위계를 이어 갑니다.

형님!, 언니!...


전 세계에서,
같은 성인들끼리 나이 차이를 두고 형, 아우 그리고 언니, 동생 하는 나라는
우리 사회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친 사회입니다.


다른 한 측면을 보겠습니다.

사법고시 8기가 검찰총장이 되면
6기나 7기는 옷을 벗어야 합니다.

이러면서도 대한민국의 헌법 제 1조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50세가 대통령이 되면
그보다 나이가 많은 모든 공무원들은 그 순간 옷을 벗어야 하는게
우리 사회의 원칙인 것입니다.

이게 우리 사회입니다.

그것 또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까지 각각의 수준에 명확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이를 따질 수도 있습니다.

10살 아이에게 18살의 요구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위와 아래를 나누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성인이 되면 이제는 더 이상 그 어떤 '위'나 '아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커다란 시스템에서 직책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위와 아래를 나누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역할의 분담일 뿐입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위이거나 아래가 아닙니다.
서로 동등하고 중요한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일 뿐입니다.

이게 성숙하고 건강한 사람들의 사회입니다.



또 다른 한 측면으로서

이제는 더 이상 오를 수도 없는 지경까지 가있는
우리 사회의 병적인 호칭 문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아무개 '님'하는 얘기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경우에 이 호칭을 사용합니다.

아마도 내 기억으로는 대략 10년 전인가 아니면 15년 전쯤
한 방송사에서 중계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여성 사회자가 심사위원들을 소개하면서
아무개님! 이라고 부른 것에서 시작된 것 같습니다.

높은 호칭을 듣고 좋아하는 사람은
당연히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고
또한 우월감으로 위장하고 사는 사람들이니

호칭은 끊임없이 높아져만 갑니다.

이제는 더 이상 높일 극존칭이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분노의 시대로 접어들게 됐습니다.


호칭은 단 한가지여야 합니다.
'아무개氏!'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어가 필요 없는 사이에서는
'氏'를 빼고 '아무개!'하면 됩니다.


성인이 되어 만나는 그 누구도 형이거나 아우가 아닙니다.
또한 언니도 동생도 아닙니다.

이제는 친구이거나 이웃입니다.
나이는 상관없습니다.

같은 成人이기 때문입니다.




(4) 투자(投資)와 투기(投機)

간단히 짚어 보겠습니다.

'나는 내가 아니에요'를 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다른 많은 사람들도 이미 사용하는 것이라면
나는 훨씬 편한 마음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투기(投機)입니다.


사전에서 투자(投資)와 투기(投機)를 각각 찾아보았습니다.

먼저 투자의 영어 말인 'invest'를 보겠습니다.

invest [invést] v.
① 투자하다.
② (돈을) 지출하다, 쓰다, 소비하다; (시간․노력 따위를) 내다. 바치다, 들이다(in).
③ 맡기다, 주다(in).
④ ┅에게 입히다; 싸다.
⑤ (관직․지위․권력․성질 따위를) ┅에게 주다, ┅에게 서임(敍任)하다, ┅에게 수여하다(with).
⑥ 〖군사〗 포위(공격)하다.


다음이 투기의 영어 말인 'speculate'입니다

speculate [spékjəlèit]vi.
① (심사) 숙고하다(ponder), 사색하다(meditate); 추측하다(conjecture)(about; on, upon).
② 투기를 하다, 요행수를 노리다(in).


우선 놀라운 것이,
투자의 뜻에는 바치다, 들이다 등의 뜻이 있는 반면에

투기의 뜻에는 숙고하다, 사색하다 또는 추축하다 등의
'생각'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투자란 어떤 '마음'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고,
투기란 '생각'의 행위이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먼저 투기는 그 어떠한 것도 건강한 것이 아닌 것으로서,
우선 서로를 위해 무엇인가를 '생산(生産)'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다른 말로 'Zero Sum Game'을 뜻합니다.

즉 그 행위로 인해 어떠한 부가가치가 생산이 되는 것이 없이,
단지 노름판에서처럼 딴 사람과 잃은 사람이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위는 서로 붙어서
남의 것을 뺏고자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는 거의 모든 행위가
바로 이런 투기입니다.


반대로 투자는 그 자체로서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병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삶 자체가 목적으로서
또한 서로가 더불어 살면서
아직 모르고 있던 그래서 그만큼 불편을 겪었던 어떤 일을 해결하기 위해
마음을 쓰는 모든 행위가 투자입니다.

나 자신의 개인 삶에서도 그렇고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서 더불어 사는 한 사회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다들 불편한 상황이었는데,
누군가가 이를 해결할 대안을 제시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시도할 힘이 대안을 제시한 한 사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경우에 서로 힘을 합치는 행위가 바로
투자(投資, Investment))입니다.

건강한 개인으로서,
또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건강한 어떤 것을 위해
마음을 쓰는 모든 행위가 바로 투자입니다.

반대로 모든 투기의 목적은
오로지 남을 이기고
또한 남을 이용하여
오로지 '나는 내가 아니에요' 만을 추구합니다.

내 삶도 수단일 뿐이고,
내가 대하는 모든 사람과 생명, 자연이
이를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바로 우리 사회가 그렇습니다.

모든 투기가 없어지고 오로지 투자만을 하려면
'나는 나예요'를 하면 됩니다.

나를 나라고 하면서 건강해지게 되면,
이제는 더 이상 어떠한 투기도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5) 술, 섹스 그리고 '꿈 ★ 은 이루어진다'

마지막입니다.

간단히 보겠습니다.

세계에서 술 소비량 2위, 또한 세계에서 성범죄 2위.
시간이 나면 찾아보겠지만
각각의 1위가 어느 나라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나는 내가 아니에요'
한 가지만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나는 내가 아닌 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괴롭습니다.

이 괴로움을 잊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술입니다.


또한 남자로서 아무런 가치도 쓸모도 없는 놈이라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끝없이 매달리게 되는 것이 섹스입니다.

나를 잘 아는 그래서 나를 무시하는 아내와는
해서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돈만 주면 나를 사장님으로 떠받들어주는
술집여자가 있습니다.
내가 못해도 나를 칭찬하고 좋아해 줍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섹스에는 전문가들입니다.
아닌 척 하지만 나를 우습게 보는 것 같습니다.

이 때 다시 필요한 대상이 아이들입니다.

이들은 아직 뭘 몰라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남자인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래서 필요한 것이 원조교제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자란 태생으로부터
아무런 가치나 쓸모가 없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의 커다란 돌파구가 있습니다.
바로 남자들이 나를 원하고 찾는다는 사실입니다.

내 남편이 나를 열심히 찾는다면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내가 아니에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가치 있다는 것이 되고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편이 나를 찾지도 원하지도 않을 경우,
'나는 나예요' 하는 상황이 되고 괴롭습니다.

이 여자 역시 다른 남자를 찾습니다.


창녀가 되는 사람들은
그전까지 나름대로 '나는 내가 아니에요'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바로 나인 것이,
아무런 쓸모도 가치도 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상황에서

한 편으로는 분노가 솟아납니다.
그래서 이 길로 접어듭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한 딸이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봐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대가 없는 실망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집착이 없는 분노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여자는 결국 분노를 터뜨리는 동시에,
이런 결정으로 인해 이후로는 많은 남자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고 또 원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아무런 쓸모도 가치도 없는 그런 존재만은 아니라고 자위합니다.

즉 결국 이런 행위를 통해 '나는 내가 아니에요'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술과 섹스가 그 끝에 와있는 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현주소이고
현재의 상황입니다.


하지만 생각은 바로 그 생각의 방식대로 무너집니다.
또한 어떤 문제이거나 간에 항상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같이,

바로 이 술과 섹스 안에는 내가 없어지고
또한 '생각'이 없어지는 자연의 원리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이제는 스스로의 방식대로
또한 스스로의 자가당착으로 결국 깨질 때가 됐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선택은 모든 개인들에게 달렸고,
그 결과 또한 모든 개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끝까지 '나는 내가 아니에요'를 추구하면서
미친 사람으로서 생을 마무리할 수도 있고,

지금까지는 몰라서 그랬지만
이런 모든 것을 순간 깨닫고,

그 과정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모든 병적인 문제에서,
즉 모든 '생각'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한 개인의 선택이고 나아가 한 사회의 선택입니다.


2002년 월드컵. 우리가 내건 구호가 바로

'꿈 ★ 은 이루어진다' 입니다.

모든 것이 극단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
마지막으로 사회 전 구성원이 합심해서 내건 구호가 바로

'꿈 ★ 은 이루어진다' 라는 것입니다.


이 것 역시, 이제는 그 끝에 와 있음을 보여줍니다.

꿈은 이루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꿈은 깨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분 모두, 누군가에게 쫓기는 무서운 악몽을 꾼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대개는 그 무서운 누군가에게 잡히는 상황에서
꿈을 깹니다.

우리 사회가 바로 이런 상황에 와있습니다.

이제는 깨어야 합니다.


꿈은 깨라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7부에서는
그 동안 쓰면서 빠진 부분을 돌아보고
맺음을 하기로 하겠습니다.

  • 김환 ()

      하나만,말할께여
    님의 생각처럼 사회자체가 모순이 아니라,
    혹시 님이 부분적인 생각이나 지식이 모순을 만드는것이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해보길바랍니다.
    꿈은 꺠라고 있으라는 말에 어느정도 많은 공감은 가나
    그게다는 절대 아니란말..
    꿈을 그저 낭만적 감성적으로 받아들인다면,깨지겟지만,
    님이 과거에 가졌던 꿈을 지금 이세상 모든사람들이
    비슷한 꿈을 가질거라 생각치 마세염!

목록


책/영화/SF

게시판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추천
279 [펌] 당신께 감사해요 system 08-08 4346 1
278 엘 니뇨(El nin~o) : 영화 '투모로우'를 보고 나서... 최성우 07-21 4664 2
277 말도 안되는 억측과 독선적 비약으로 전개해 본 대한민국 해체 음모론 댓글 1 강동민 07-17 4432 2
276 고등학교 시절 명상시간에 들었던 이야기 주한종 07-15 4992 2
275 너 어디서 왔냐? 댓글 2 andysheep 07-15 4837 3
274 [펌]여자들이 군대를 간다면? 아마 이런 대화가?? song 07-13 4781 3
273 저는 제법 맞던걸요... 댓글 5 최희규 07-08 4352 1
272 어제 서울시 홈페이지가 이랬었습니다... 댓글 2 DragLord 07-04 4644 3
271 이공계 기피의 역사적 뿌리 cantab 06-13 5218 3
270 답변글 이 글의 풀버젼(?) 댓글 2 DragLord 06-14 4989 3
269 간미연으로 삼행시..- 서울공대 화장실에서...ㅡㅡ; 댓글 7 공대생 06-08 7859 4
268 걍 보고 웃어요. 이공대 화장실 낙서 댓글 4 Dirac 05-08 6089 6
267 그림論 - (7) 맺음말 댓글 1 abydos 04-29 4519 7
열람중 그림論 - (6) 우리 사회의 현주소 댓글 1 abydos 04-29 4688 7
265 그림論 - (5) 재즈(Jazz)에 비친 원리 abydos 04-29 5734 8
264 그림論 - (4) 마트로시카(Matryoshka) 원리 abydos 04-29 5202 5
263 그림論 - (3) 치료 과정 abydos 04-29 4189 7
262 그림論 - (2) 그림論 abydos 04-29 4720 5
261 그림론 (1-3) abydos 04-29 4152 8
260 그림론 (1-2) abydos 04-29 4498 6


랜덤글로 점프
과학기술인이 한국의 미래를 만듭니다.
© 2002 - 2015 scieng.net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