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부활의 10대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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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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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2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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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100이냐? 南美化냐?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는 금융세계화와 자본시장 개방 체제에 빠르게 편입됐다. 그 결과 우리 경제는 외국자본의 이익과 국민경제의 이익이 상호 충돌하는 국면에 처해 ‘창틀에 갇힌 작은 용’처럼 추락하고 있다. 이제는 현실의 제약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기득권의 해체를 노리는 한풀이 개혁이 아니라, 대중의 삶을 위한 실사구시의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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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한국 현대정치사의 최대 드라마를 연출했다. 힘에 부치던 44석의 의석을 일거에 과반수 152석으로 끌어올린 4·15총선은 가히 총성 없는 정치혁명이라고 일컫기에 손색없다. 그러나 이런 사건(?)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기성 정치에 대한 일반 대중의 환멸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외환위기 이후 생활 조건의 지속적인 황폐화를 겪고 있던 다중은 정치개혁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부패를 청산해 깨끗한 정치가 이루어지면 자신들의 생활이 저절로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이제 노무현 대통령은 경제에 대한 비전으로 다중의 희망에 답해야 한다. 과연 노대통령은 경제 살리기의 해법이 있는 것일까. 필자의 추측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는 정치개혁, 사법개혁, 언론개혁에 대해서는 분명한 철학이 있고, 이 철학을 현실에 옮길 수 있는 전략과 전술의 구사가 가능하다. 그러나 경제에 관한 한 그는 초년병이다.


 
“최루탄이 난무하던 시절에도 우리 경제가 크게 발전했는데, 요즘처럼 탁 트인 시대에 경제발전이 안 될 이유가 없다”는 그의 경제관은 극히 단순(naive)할 뿐만 아니라 위험천만하다. 이에 필자는 탄핵 시비라는 큰 고통의 시간을 겪고 다시 자리에 임하는 대통령께 진언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이익 내고도 고용에는 무관심한 외국 자본

외국자본은 국내 주식시장을 좌지우지하는 큰손이다. 이미 약 150조 원을 투입한 외국인 투자자는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40%를 장악했다. 아직 절반은 아니라고 안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재벌그룹이 지배권 유지를 위해 가지고 있는 붙박이 주식(계열사간 순환출자 등)을 떼놓고 생각한다면 외국자본 비중은 이미 유동주식의 60%를 웃돈다고 볼 수 있다. 더욱 두드러진 특징은 이들 외국인 투자가 일부 대기업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외국인투자는 700 개의 상장 주식에 고루 분포되어 있지 않고,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를 맞춘다는 약 30개의 우량기업에 집중되어 있다.

외국인 투자가 집중된 포스코·삼성전자·LG전자·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한국통신·SK텔레콤 등 소위 30대 우량기업은 외환위기 이후 강력한 구조조정을 통해 외형 위주의 경영에서 이익 중시 경영으로 돌아섰고, 근년 수조 원의 이익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우량 대기업이 고용을 창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유사 이래 높은 경상이익을 달성하고 있는데 고용의 순증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일종의 역설적인 현상 - 우량의 역설 - 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젊은이들에게 일자리의 비전은 누가 제공할 수 있는가. 불량기업에 고용을 책임지도록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처럼 이익 창출과 고용 창출이 연결되지 않는 데는 외국인 투자자의 이해관계가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 자본은 주주라는 꼬리표를 달고 국내 주식시장에 쏟아져 들어왔다. 이들 외국자본 중 안정적 직접투자 자본(특정사의 지분을 단독으로 10% 이상 보유한 경우)의 비중은 5%에 미달한다. 95%에 달하는 절대적인 비중은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혹은 투기성을 배제할 수 없는 증권투자 자본이다.

이들 단기적 주주자본은 세계 100개 국을 대상으로 포트폴리오를 운영하므로, 한국의 주식시장 그리고 국내 특정기업의 상장주식에 목매달 이유가 없다. 이들로서는 가능한 한 이른 기간에 기대수익률을 달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로 이 때문에 지분의 50% 이상을 외국인 주주에게 넘긴 국내의 유력 기업들은 이들이 요구하는 단기업적주의에 부응해야 하고, 그런 만큼 경쟁력 확보를 위한 중장기 투자는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이로써 주주의 단기적 이익과 기업의 중장기 경쟁력 투자 사이에 갈등·상충 관계가 형성되고 말았다. 애초 외국인투자는 국내의 총투자 파이를 키워 일자리를 만들고, 투명성을 높이고, 선진 경영기법을 들여와 경쟁력 향상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기업의 투자위축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제조업 대국으로 용틀임하는 중국의 위협 속에서 우리 경제는 하루빨리 고부가가치화로 탈바꿈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첨단 설비투자, 연구개발투자, 교육훈련 투자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에도 국내 자본시장을 포위한 외국인 주주의 단기주의 압력은 이런 꼭 필요한 투자의 발목을 잡기에 이르고 만 것이다.

외국자본의 지배적 지위는 주식시장에 머무르지 않는다. 은행권에 대한 외국자본의 영향력은 가히 세계적 수준이다. 한미·제일·외환은행의 경영권은 완전히 외국자본에 넘어갔고, 국민-주택·신한-조흥·하나-서울은행도 명색은 국내 은행이지만 속내는 외국인 주주의 단기주의 압력에 빠져들었다. 그 결과 은행들은 각자 이익만 내면 그뿐이라는 조직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 시장이 유동성 위기에 빠져들 경우 십시일반 해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시장을 지키기 위한 은행의 당연한 도리임에도 저마다 무임승차(free riding)만 하려고 할 뿐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은행권의 전략 수정이다. 돈 되는 장사에 집중해야 한다며 저마다 기업금융을 대폭 축소하고 가계금융 위주로 자산 운영을 바꿔버렸다. 그 결과 국민의 저축을 동원해 기업에 대출해주고, 그럼으로써 국민경제의 성장 발전에 기여한다는 교과서에 나와 있는 은행의 역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세계 굴지의 시티은행이 한미은행을 인수했다고 사정이 나아질 가능성은 없다. 이헌재 경제부총리는 “시티는 책임감이 강한 은행”이라며 큰 기대감을 피력했지만, 한미은행에 대한 주식 공개매수 후 상장폐지하겠다는 시티은행의 의도가 무엇인지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특히 시티은행이 노리는 분야가 부자들의 돈을 관리하는 프라이빗 뱅킹(private banking)과 대기업의 현금유동성을 관리하는 글로벌 캐시 매니지먼트(global cash management)라고 볼때, 국내 저축자산의 해외 이탈은 더욱 심각해질 가능성이 크다. 수익성 측면에서 국내에 마땅한 투자 대상이 없기에 시티은행은 강남의 부자 돈과 30대 우량기업의 현금 유동성을 긁어모아 해외에서 운용할 가능성이 크고, 이로써 국내저축과 국내투자의 괴리 현상은 더욱 심화할 것이다.

미국 흉내내다 어긋나버린 한국경제

외환위기 이후 일관되게 보이는 총투자율과 총저축률의 하락 추이는 한국경제가 왜 성장 동력을 잃고 주저앉고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외환위기 이전 한국경제는 GDP 대비 38~39%에 달하는 높은 투자율과 36~37%에 달하는 높은 저축률을 달성했다. 이로써 국내 저축을 최대한 동원해 국내의 물적 투자를 최대한 끌어당기는 투자 견인의 경제성장이 가능했다. 혹자는 과도한 투자가 외환위기를 불러들인 결정적 원인이라며 비판했지만, 문제는 자동차 산업에서 그러했듯 같은 분야에 대한 중복투자였지, 투자의 규모가 컸던 것이 우리 경제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외환위기 이후 수익성을 최우선하는, 혹은 투자를 경원시하는 경제정책이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름 하에 자리잡으면서 국내의 총투자율은 급격히 하락한다. 조·중·동 등 보수언론은 친노동자 성향의 노무현 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불확실성이 높아져 투자가 위축되고 있다고 성토하지만, 이는 잘못된 진단이다. 투자는 DJ 정부 내내 하락세를 그리며 현재 29% 수준으로 추락한 것이지, 결코 노무현 정부의 등장이 투자 위축세를 조장했다고 말할 수 없다.

어찌됐든 투자는 DJ 정부 내내 위축 일로에 있었는데, DJ 정부는 이를 우려하기는커녕 오히려 소비가 견인하는 성장이 선진경제라며 떠벌렸다. 그 결과 진념식 소비부양 경제정책 하에서 저축률은 30% 수준으로 내려앉았고, 급기야 신용카드 남발, 가계금융 폭증, 신용파탄자 양산이라는 문제가 잉태되었다.

결국 소비도 파탄나고, 투자도 파탄난 채 한국경제는 오로지 수출에 목을 맨 형국이 되고 말았다. 외국자본이 원화의 절상 가능성에 도박을 걸고 쏟아져 들어와도 수출전선마저 파탄날까 노심초사하는 재경부는 무한정 원화를 방출해가면서 1달러 1,150원대의 환율을 유지하고자 환율전쟁을 벌인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외환위기에 대한 잘못된 진단이 나라 망쳤다

이제 투자 회복이 진정 심각한 과제다. 국내에서 투자가 활성화되지 않으면 한국 제조업의 미래도 없고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될 전망도 없다. 국내에서의 고부가가치화를 위한 집중적 플랫폼 투자 없이 저마다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겨간다면 일정 기간 기업의 수익성은 유지되겠지만, 중장기적 경쟁력의 확보는 불가능하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가 전범으로 받아들인 미국식 경제모델은 우리 경제의 향후 궁극적인 도착 지점이 얼마나 암울한 형세일 것인가를 말해준다. 매사추세츠대학 크로티(J. Crotty)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의 비금융업체가 창출한 순이익의 70∼80%는 철저히 주주자본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즉, 기업의 이익을 사내유보해 미래를 위한 재투자에 사용하는 정상적인 기업 성장의 메커니즘이 붕괴하고, 기업을 구조조정해 최대한으로 이익을 짜낸 후 이를 배당금 지급, 자사주 매입, 스톡옵션 형태로 주주자본과 경영자가 나눠 먹는 다운사이징(주주이익극대화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미국식 경제를 그대로 따라야 할 것인가. 미국은 주주를 위한, 즉 금융자본을 위한 경제로 자리매김했고, 그 결과 인내하는 자본(patient capital)의 부족으로 제조업이 황폐화되고, 세계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심각한 사회로 전락했는데, 우리도 대책 없이 이런 길을 따라야 한다는 말인가.

현재 한국경제의 최대 문제는 현상적으로는 일자리 전망의 부재다. 청년실업 폭증, 정규직 소득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비정규직 폭증, 실업률에 포착되지 않는 실망실업자(혹은 구직단념자)의 폭증 현상이 심각하다. 그리고 일자리 문제의 배후에는 실물투자 위축 현상이 있고, 이를 초래한 것은 단기적 이익을 중시하는 외국 금융자본의 지배적 영향력이다. 다시 말해 국민경제가 주주이익 극대화의 논리에 빠져 중장기적 전망을 상실한 것이 구조적 위기의 본질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은 다름 아닌 1997년에 발생한 외환위기에 대한 잘못된 진단이다. IMF와 DJ는 물론 학계, 시민단체까지 모두 한목소리로 내부적 결함 때문에 위기가 발생한 것으로 진단했다. 지난 25년 동안 금융의 투기화로 인해 세계 각국에서 무려 100여 차례에 걸쳐 외환금융위기가 빈발했음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외부적 조건의 모순은 일체 접어놓고 재벌체제-정경유착-관치금융의 구체제가 과잉투자를 초래함으로써 위기를 초래했다는 내부적 결함만 집중추궁했다.

채권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IMF는 당연히 내부결함론을 지지했고, 약체 정권으로 출발한 DJ는 구정권을 무력화시키기에 유리하다는 정치적 계산 하에 내부결함론을 옹호했다. 종래 재벌 성토에 앞장서온 학계와 시민단체는 재벌 때려잡기의 절호의 기회로 내부결함론을 지지했다. 그 결과 구체제의 해체를 위한 대수술이 이루어졌고, 그런 가운데 외국자본은 한국경제의 개혁과 선진화에 기여할 전략적 파트너로 인정받았다.

‘자본시장개방론-외자순기능론’은 이렇게 형성되었고, 고삐가 풀린 외국자본은 주주라는 꼬리표를 달고 이 땅에 들어와 주주 가치 극대화를 외치며 단기적 이윤 챙기기에 나섰다. 그렇게 주식시장과 은행권은 외자에 접수되었고, 한국경제는 성장의 동력을 상실한 채 ‘창틀의 갇힌 작은 용’이 되고 말았다.

유럽의 소국인 스웨덴·핀란드·네덜란드·스위스 등은 유럽의 대국인 영국·프랑스·독일·스페인·이탈리아보다 잘살거나 삶의 질에서 손색이 없다. 이들 나라가 매우 개방적인 나라라고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외국자본에 의존해 세계적 기업을 키우고 경제력을 키워온 것은 아니다.

유럽 소국을 선구적으로 연구해온 피터 카첸스타인(Peter Katzenstein)은 이들 유럽 소국들은 개방을 원칙적으로 수용했으나, 경제대국과 달리 국적자본을 키우고 다스리는 방식으로 다양한 국내적 조절장치를 마련함으로써 개방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국민경제의 안정적 발전을 기했다는 점을 중시한다.

예를 들면 비 오는 날에 대비해 국내 기업들에 투자적립금을 쌓아두게 한다거나, 국적 은행을 통해 지역-산업정책을 추진했다거나,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통해 사회적 통합을 이뤄냈다거나 혹은 유력기업의 지배권을 보호하는 대신 자본의 사회적 책임을 추궁했다는 점을 이들 나라의 차별적인 대내적 조절장치로 높이 평가한다.

스웨덴 좌파의 실용주의적 선택

미국 같은 경제대국이야 개방해도 그 충격이 경제규모에 비추어 별로 크지 않아 개방 비용의 흡수가 용이하다. 게다가 필요에 따라서는 패권적 지위를 이용해 타국에 비용을 전가할 수 있으므로 이렇다할 대내적 조절 장치의 마련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경제 소국으로서는 대외 개방과 대내 조절을 교차시키는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탁월한 분석이다.

이들 유럽 소국은 그간 높은 수준으로 자본시장을 개방했지만, 그렇다고 주요 기업의 지배권이 외국자본에 넘어갔다고 볼 수 없다. 이른바 주요 기업과 금융기관에 대한 ‘자본의 국적성’이 두루 관찰된다. 자본이란 모름지기 이윤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동질적이지만, 국민경제와 사회의 공동체적 이익 관점에서는 일정 수준 통제를 가할 수 있는, 혹은 사회적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 자본이 무엇인가를 잣대로 자본의 국적성을 논의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스웨덴의 발렌베리 재벌의 존재는 매우 흥미롭다. 발렌베리 재벌은 150년의 역사를 갖고 5대째 이어지는 재벌로, 산하의 14개 상장기업이 스웨덴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그 규모가 막대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에릭슨·엘렉트로룩스·사브·스카니아·ABB·SE은행 등이 대표적 그룹 기업이다.

발렌베리 재벌도 우리나라 재벌과 다름없이 소액주주로서 피라미드 소유구조를 통해, 또한 재벌 가문에 대한 특혜성 차등주식(주당 의결권이 10∼1,000개인 주식)을 통해 지배권을 유지하고 있다. 도대체 1932년 이후 무려 70년간 집권해온 스웨덴의 사민당 정권은 어떻게 이런 경제정의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재벌의 존재를 용인한 것일까.

스웨덴의 사민당 정부는 한때 발렌베리 가문의 기업들을 국유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치열하게 국제경쟁을 벌여야 하는 이들 기업을 공무원에게 맡길 수 없다고 인식했다. 그러던 중 1930년대 내내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스웨덴 경제가 휘청거리자 사민당은 마침내 발렌베리 가문으로부터 국민경제에 공헌한다는 약속을 받고 지배권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1938년의 살트셰바덴 협약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써 발렌베리는 지배권의 대가로 노동권을 인정하고 양질의 일자리와 기술투자, 85%의 높은 소득세를 납부한다는 사회적 협약을 받아들였다.

이것이야말로 스웨덴 좌파의 현명한 실용주의적 선택이었다. 만약 차등주식을 폐기함으로써 발렌베리 계열의 기업들이 속속 외국자본에 팔려나갔다면 사민당은 결코 이처럼 파격적인 사회적 약속을 받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자본의 국적성을 인정한 스웨덴의 지혜는 오늘날 기득권의 해체에 쏠려 있는 우리나라의 경제개혁에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최근 공정거래위 강철규 위원장은 재벌 소유 금융사의 의결권을 30%에서 15%로 줄이는 법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투자자의 돈으로 계열사의 지배권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는 경제정의에 입각한 원칙론이다. 그러나 이런 개혁입법을 삼성그룹이 처한 사정에 대입해보면 갑갑해진다. 삼성전자의 최대 지분을 보유한 삼성생명의 의결권이 축소될 경우, 삼성전자가 외국계 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 위협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

재별개혁이 ‘기업죽이기’돼선 곤란

알다시피 삼성전자는 국내기업으로서는 유일하게 세계적 수준의 첨단 기술경쟁에 돌입해 3개월마다 새로운 대규모 투자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갑자기 지배권이 흔들릴 경우 조직의 순발력과 응집력이 크게 훼손되지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국내적 인수 대안이 뚜렷하게 마련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서 재벌의 복합그룹경영이라는 장점까지 소멸시키는 현행 재벌개혁 방식은 어렵게 일궈낸 국내의 물적 기반을 붕괴시킬 수 있기에 매우 위험하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재벌기업은 주주가치 패러다임에 의해 자신들의 지배권을 위협받기에 이르렀고, 노동자들은 주주가치로 인해 일자리의 전망을 상실하고 있다. 또한 정부는 외국자본이 장악한 주식시장과 은행권에 대해 이렇다할 통제력을 상실한 채 좌불안석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성장 동력을 다시 키우고 일자리 전망을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 것일까.

한 편에서는 암울한 현실로 인해 박정희 시대로의 회귀를 바라는 사회적 분위기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간의 민주화를 위한 국민적 노력과 높은 성과를 감안할 때 과거의 개발독재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민주사회에 걸맞은 방식으로 새롭게 성장 동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닌 사회적 합의의 모델이다.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찾아내 상생의 길을 찾는 것이다. 사회적 대타협이 포괄해야 할 대안적 경제정책의 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재벌의 사회적 책임을 전제로 재벌의 지배권을 인정한다. 이에 대한 대가로 재벌은 사회공헌기금을 출연하고, 일정 수준을 초과하는 이익에 대해 투자적립금을 쌓도록 한다.

둘째, 재벌이 출연한 사회공헌기금은 남북경협, 지역균형발전,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 등 대규모 모험투자에 활용해야 하며, 정부는 이런 모험사업에 금융기관의 참여를 독려한다는 차원에서 재정지원을 통해 금융기관과 위험을 분담한다.

셋째, 금융산업에서 국민의 저축을 동원하고 관리하는 은행, 투신사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이들 주요 금융업종에서 국적자본과 해외자본의 균형적인 경쟁 구도를 만들어낸다.

넷째, 주요 대기업과 주요 금융기관의 지배권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된다면 운명공동체적 접근 방식에 입각해 국민연금을 전략적 지분출자자로 활용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적극적 주주로서 혹은 소극적 주주로서 행동을 차별화한다.

다섯째, 정보통신(IT)·물류·금융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 중심국가 구상은 미래를 위한 준비로서 계속 추진하되 특성상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한계가 있으므로, 전통 제조업의 고부가가치화에 산업정책상의 우선순위를 부여한다.

‘사회적 대타협’은 가능하다

여섯째, 국내의 모든 산업과 모든 지역이 글로벌 경쟁 체제에 편입될 필요는 없으므로, 글로벌 섹터는 지역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방식으로 키워나가고, 국내생산에서 소비로 연결되는 로컬 섹터는 차별화된 방식으로 육성한다.

일곱째,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의 무차별한 적용을 제한한다. 특히 전통 제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위해서는 일자리의 안정을 통한 꾸준한 기술 축적이 요구되므로 업종의 특성에 따라 노동시장 유연화를 제한한다.

여덟째, 국민의 의식과 역량이 높아진 점을 감안해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단계적으로 허용하며, 아울러 기업별 노조의 문제점을 극복한다는 차원에서 산별노조의 발전을 적극 유도한다.

아홉째, 주식시장, 외환시장에서의 투기적 행위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자본이득세, 외환거래세의 도입이 필요하며, 또한 주주가 구조조정을 통해 얻은 이익을 유상감자, 고배당 방식으로 취득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별도의 과세 조치를 강구한다.

열째, 주주자본과 경영자 간의 과도한 연대는 기업의 중장기 경영을 저해하므로, 주주가 경영자에게 지급하는 스톡옵션에 대해 옵션 보유 기간에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등 무리한 이윤추구 행위를 했을 경우 옵션 행사권을 취하한다.

이상 10가지의 정책대안은 제각기 흩어진 파편이 아니라 상호 연계된 한 묶음의 패키지다. 따라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노·사·정 3자가 제각기 양보하고 상대를 설득해야만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며 패키지 형태로 타협점에 도달할 수 있다. 전체적인 조율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몫이다. 이를 위해 노대통령은 한국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진보적 기류를 생산적으로 다스리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국의 진보는 이미 한국사회의 주류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들의 시각은 아직 1970, 80년대의 보수 대 진보의 대립구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다. 1990년대 이후 본격화한 금융세계화와 국민경제의 긴장관계를 적극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원하는 투명성-책임성의 개혁은 기득권의 해체는 가능하게 할 수 있지만, 더욱 나은 대중의 삶으로 이어질 공산은 희박하다.

이에 노대통령은 진보에 책임성을 요구해야 한다. 성장 동력을 만들고 경쟁력을 확충하는 것도 진보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한다는 거대담론에서 벗어나 글로벌 금융자본주의라는 시대적 제약 조건 하에서 국민경제의 경쟁력과 형평성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말 되는’ 정책 프로그램을 그들이 산출하도록 압박을 가해야 한다.

글 : 외부기고자 이찬근 인천대 무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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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2004년 06월 01일 343호

  • 임호랑 ()

      한번 귀기울여볼만한 글이군요.
    이렇게 하려면 진정으로 '대타협과 대범한 접근'이 필요할 것 같군요.

  • 김하원 ()

      글쓴 분이 제시하신 여러가지 방안들은 나름대로의 일장일단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적어도 이를 추진할 주체가 매우 깨끗하고 또한 효율적이며 유능하다는 전제하에 성립되는 것들입니다.

  • 김하원 ()

      증시에 들어온 외국인 투자자본은 150조원입니다. 현재 이들 외국인 자본이 남기는 여러 부작용에 대한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내를 떠돌고 있는 유동자본은 현금과 3개월 이하의 단기채권만을 집계해도 380조원에 이릅니다. 이들이 왜 증시로 투자로 들어오지 않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관리'가 아니라 '세일즈맨'으로써..

  • 배성원 ()

      재벌을 지배구조를 인정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파격적인 사회적 책임을 그들이 감당한다는 협약이 같이 준비되어야 하겠죠. 스웨덴은 85% 로군요.
    우리나라 재벌들이 지배구조 인정의 반대급부로 내 놓을 수 있는건 무었무었이겠습니까? 과연 제대로 내 놓을까요? 우리 나라의 재벌들이 과연 저 사민주의 북유럽 국가의 재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도덕성은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까요?

  • zeus ()

      그렇죠...사실 제일 큰 문제는 대타협을 이끌어내기에는 소위 가진자들의 마인드가 공동체의식이 없이 너무 이기적이라는데 있긴 합니다.. 그렇다고 그네들에게 당장 도덕성을 요구하기보다는 위에 어떤 분이 언급하신대로 정책입안자들이 세일즈맨의 자세로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그들의 금융,부동산투기자본을 생산적인 설비재투자자본으로 쓰일 유인책인 법안 및 세제를 바꾸는것이 주효할듯 싶군요..그런데 불행한것은 정관계가 가진자들이랑 이기주의적인 측면에서 거의 다를바가 없다는데 있죠..-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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