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데스크칼럼]"히딩크의 성공과 배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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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6-1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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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히딩크의 성공과 배타주의

〈서배원·경제부장〉

국민 모두가 염원했던, 그러나 아무도 감히 자신하지 못했던 한국 월드컵대표팀의 16강 진출이 마침내 이뤄졌다. 경기장과 거리, 그리고 아파트 단지의 마당에서 울려 퍼진 16강 환호의 함성 속에서 우리가 느낀 카타르시스는 민족적 자존심에 대한 확인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그 확인을 위해 실로 오랜만에 태극기를 머리와 가슴에 두르고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어떤 이는 4·19 혁명 이후 그처럼 서울 거리에 인파가 쏟아져 나와 환호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고, 누구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자신을 거리로 내몰아 인파에 휩쓸리게 했다고 기뻐했다. 한국을 경제적으로 우뚝 서게 한 ‘한강의 기적’ 이후 경험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기적은 그런 국민적 일체감 속에서 탄생했다. 한국축구가 세계 수준의 축구로 거듭난 것은 분명 한강의 기적과 견줄만한 사건이다. 그리고 그 기적의 의미는 한국축구 글로벌화의 성공이라 할 수 있다.

성공한 한국축구 글로벌화의 한 가운데에 거스 히딩크가 있다. 히딩크 감독은 아마 우리 현대사에 등장한 외국인 지도자 가운데 가장 성공적으로 평가받은 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히딩크 리더십의 핵심은 흔들리지 않는 소신과 공정성, 전문성으로 요약된다. 이를 바탕으로 한 히딩크의 성공 사례가 이제 우리 의식 속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우리 외의 것’에 대한 배타주의를 허무는 기폭제가 되길 바란다면 지나친 기대일까. 우리의 배타주의는 크게는 외국인과 외국기업에 대한, 작게는 학맥·인맥 등으로 우리끼리 벽을 치는 차별의식이다. 우리는 지금도 ‘벽안(碧眼)의 지도자’ ‘검은 대륙의 돌풍’ 등의 표현을 쓰면서 무의식적으로 피부색으로 나와 남을 구별짓는다. 히딩크의 성공은 그러나 인종과 국적이 개인의 역량을 발휘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결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히딩크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학맥·인맥 등과 무관하게 실력위주로 선수를 뽑을 수 있었다”는 축구 관계자의 말은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아픈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이 이미 글로벌 스탠더드에 의해 규정되고 운영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글로벌화는 이미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글로벌화의 진전에 따라 많은 기업이 해외투자를 늘리고 외국기업과의 전략적 제휴 등을 가속화하고 있다.


우리 시장에도 이미 적지 않은 외국인 인력이 들어와 일하고 있으며 그들은 전문가에서부터 일용직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은 글로벌화의 요체인 ‘사람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여전히 배타주의의 인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외국기업에 대한 일반 국민의 시각에도 부정적 인식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상장기업 임원 가운데 외국인의 비율이 3% 정도에 그치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전자의 58개 현지법인 가운데 외국인이 법인 대표를 맡은 경우는 한 곳도 없다. 외국에서 생산된 많은 우리 기업의 제품이 현지 시장에서 점유율 1, 2위를 달리는데도 현지 관리자는 아직도 대부분 한국인인 것도 그런 예다. ‘우리끼리’이어야 마음이 놓이고 직성이 풀리며 다루기 쉽다는 의식이 너무 뿌리 깊다. 말 잘 통하고 다루기 쉬워야 하며 친근해야 한다는 이유로 한국축구가 히딩크를 배척했다면 오늘의 기적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기업이 한국축구가 이룬 기적처럼 월드컵을 계기로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려면 ‘우리끼리’의 벽을 뛰어 넘지 않으면 안된다. 최근 대기업들이 국적 불문하고 우수 인재를 대대적으로 뽑기로 했지만 채용에 그칠 것이 아니라 내국인과 차별 없이 그들도 책임있는 리더의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외국기업이란 사실만으로 기업의 활동을 차별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로 버려야 할 대상이다. 그것은 소국의 경제를 유린하는 다국적 투기자본과 기업들을 경계하는 자세와는 별개의 문제다. 맥도널드 햄버거가 어느 나라 음식인지를 따지면서 먹지 않는 글로벌 시대에 국적과 인종을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서배원 b1seo@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2년 06월 16일 18:2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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