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무식은 자랑이 아니다!"

글쓴이
최성우
등록일
2002-08-17 14:06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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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덧붙이는 글은 제가 과학평론가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에서 과학의 대중화가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면서 몇 년 전에 한 커뮤니티의 온라인 공간에 처음 올린 글입니다.
그간 이곳 게시판에서도 여러차례 지적된 바 있는, '상당수 관료, 사회지도층의 과학기술에 대한 무지, 정책의 난맥상, 그리고 정부 내의 이공계출신 푸대접' 등의 문제와도 상당한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작년에 한겨레신문 과학칼럼(21세기를 여는 열쇠)에도 이것을 짧게 요약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만, 이번에 책(상상은 미래를 부른다)를 내면서 다시 '원문'을 거의 복구를 시켰습니다. 극히 일부 수정은 했습니다만... 이미 출판된 책에 나오는 글임을 감안하여, 비록 제 글이긴 하지만 출처를 명기했습니다.

오랜만에 약간 긴 글을 올리게 되었군요...
아래 글에서 나오는 예들은 제가 꾸며낸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한 실제 사례들입니다.
앞 글의 세계일보 기사에서도 이와 좀 관련된 문제가 나왔는데, 지난 총선에서 '낙선운동'이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듯이, 앞으로는 "과학기술에 무지, 무능한 관련 정치인과 관료들에 대한 경고와 퇴출"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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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은 자랑이 아니다!


최성우 (과학평론가; hermes21@nownuri.net)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과학 대중화를 위한 많은 노력들이 나름대로 펼쳐지고 있다. 일반인을 위한 과학서적들이 적지 않게 쏟아져 나오고 있고, 과학을 소재로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드라마가 방영되는가 하면, 정부 관련부서나 과학기술 단체들을 중심으로 과학문화운동을 위한 여러 행사와 이벤트 등이 진행되고 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인 감이 없지 않으나, 아무튼 과학을 소수 전문가들의 것이 아닌 일반대중의 것으로 만들어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크게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과학입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도 일부 유능한 과학기술자들만의 업적으로는 어려울 것이며, 대중적인 관심과 지원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선진제국에 비하여 까마득히 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또한 '전국민의 과학화운동'을 제창했던 박정희 정권을 비롯해서, 과학입국과 과학 대중화운동을 전면에 내걸지 않는 정권이 거의 없었으나, 대부분 허울 좋은 구호로 끝났을 뿐 실제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과학 대중화를 가로막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바로 과학에 대한 무지를 당연하게 여기는 그릇된 풍조이다. "과학은 과학자들이나 알아서 할 문제일 뿐, 나는 몰라도 된다."는 식의 이상한 사고방식이 평범한 시민들 뿐 아니라, 사회지도층과 일부 지식인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느낌이다. 그들 중에는 '과학에 대한 무식함'을 당연시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무지를 자랑스럽게까지 여기는 해괴한 경우도 적지 않다.

몇 년 전에 필자는 환경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어느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한 민간기업에서 환경운동에 필요한 장비를 하나 선보였는데, 바로 수질오염 측정 등에 필수적인 'BOD 측정장치'였다.
그런데, 당시에 사회를 맡은 어느 국회의원이 그것을 소개하면서, "저는 무식해서 도무지 모르겠는데, 뭐 영어로 BOD인지 뭔지를 재는 장비라고 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속으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BOD가 '생화학적 산소 요구량'(Biochemical Oxygen Demand)이라고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할 망정, 그것이 수질오염의 척도가 된다는 것쯤은 웬만한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기초적 상식일터인데 일국의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는 것이 그리도 '자랑'일까? 설혹 자신이 실제로 모르지는 않았으나,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기 위한 과장으로 그랬다고 치더라도, 그런 무지가 합리화되는 풍조야말로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가끔씩은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세익스피어가 누구이며, 어떤 작품을 썼느냐?" 라고 물었는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무식한 사람'이라고 한마디 들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가 인문계를 전공한 사람이건 이공계를 전공한 사람이건 관계없이 기초적 상식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일반 사람에게 "뉴턴의 운동법칙은 어떻게 표현되며,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 중에서도 제대로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도 "그런 골치 아픈 것을 뭐 하러 묻느냐?"라고 면박을 당하기가 쉽지 않을까?
문학, 예술, 역사 등의 다른 분야에서는 '무식하다는 소리를 안들을 정도의' 기초적 상식이 당연히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왜 유독 과학에서만은 소수의 전공자들을 제외하고는 '몰라도 된다'라고 여겨지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혹자는 과학은 너무 세부적이고 일반인들에게는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할지 몰라도, 그것이 곧 무지를 합리화시켜 준다고 보기에는 궁색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언젠가 과학사를 전공한 교수님 한 분이, 인문, 사회과학자들과의 모임에서 낯 뜨거운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가 신문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사회과학자 한 분이, 자연에 대하여 너무도 기초적인 질문을 하는 바람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적지 않게 당황스러웠다는 것이다. 초등학생도 아닌 대학교수까지 지내는 사람이 전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그런 질문을 하는 데에 더욱 놀랐다고 말씀하신 그분은, "만약 자연과학 교수가 사회과학자들에게 '마르크스가 누구냐?'라고 질문했다면, 그분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라는 얘기를 덧붙였다.

필자가 대학 1학년 시절에, 학교 도서관에서 일반물리학 리포트문제를 풀다가 법학과에 다니던 친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필자가 문제를 푸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그것이 무슨 문제냐고 물어왔다. 친구가 나름대로 관심을 갖는가 보다 생각하고 꽤 열심히 설명을 해 주었는데, 필자의 친절한 설명을 다 듣고 난 후 그 친구는 "그런 것은 그냥 재보면 되지 뭐 하러 힘들게 푸느냐?"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적지 않게 기분이 상해서 한마디 해 주려다가,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그만 두었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도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에, 적지 않은 타 학문 분야의 학생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예상 밖으로 무지할 뿐 아니라 상당한 편견도 지니고 있다는 점에 놀란 적이 많았다. 어찌 보면 그런 식의 편가름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고, 그들만의 책임이라고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학, 공학 분야의 전공자들이 과학기술을 대중들에게 제대로 소개하고 전달할 의무가 있듯이, 다른 분야의 지식인들과 일반 시민들 또한 심오하고 세부적인 과학기술지식까지는 아니더라도 과학기술 전반과 기초적 상식 정도는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IMF 구제금융 사태를 맞이한 직후부터 그동안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해온 것이 경제위기의 근본원인이었다느니, 과학기술의 진흥만이 우리 경제를 살리고 선진국에 진입하는 지름길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귀 아프게 들어왔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과감한 투자 못지않게 과학기술의 대중화 역시 선결과제 중의 하나일 것이며, 아울러 일반인들이 과학에 대한 무지를 당연시하는 잘못된 풍조부터 척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국가정책을 주도하는 정부 관리들과 사회지도층, 지식인들부터 '과학을 모르는 것이 결코 자랑이 아님'을 똑똑히 깨닫고서 솔선수범하지 않는다면, 과학입국이니 하는 화려한 구호들은 또다시 공염불로 끝나고 말 것이다.


"상상은 미래를 부른다(사이언스북스)"
4부 '과학은 어디로 가는가?' 中에서

  • 임종관 ()

      의외로 인문/사회계 나온 사람들 중에 그런 편견가진 사람들 많습니다. 그리고 공학/과학에만 돈을 쏟아붇는 현실을 못마땅해하며 역으로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이기도 하는거죠. 이른바 공대생을 일컫는 '단무지'는 공대생이 자신을 깍아내리기 위해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 다중인격자 ()

      어디선가 읽어본적이 있는....어디였는지...

  • 최성우 ()

      제가 이 글을 처음 올린 곳은 PC통신 나우누리의 프론티어 플라자(Flaza)라는, (제가 속한) '21세기 프론티어'라는 단체가 운영하는 공개 게시판이었습니다.  혹 그곳 독자들이 다른 통신공간으로 퍼올렸을지도 모르겠군요...

  • 프로그래머 ()

      앞에서 말한 국회의원은 무식하다는 것도 잘못인데, 성의도 없군요.

  • 프로그래머 ()

      최소한 그러한 자리에서 사회를 본다면 어느 정도 공부를 하고 와야죠. 그 국회의원이 정말 무식해서 아무리 공부를 해도 BOD를 외우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주 성의가 없는 사람일 겁니다. 아니면 과학기술을 우습게 보는 사람이겠죠. 과학 기술자들이 열심히 연구해서 이루어 놓은 성과를 우습게 보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은 아니겠죠. 하여간 앞에 쓰여진 것이 사실이라면 기본이 안된 사람 같네요.

  • 배성원 ()

      하하하.. 프로그래머님은 고만한 일에 흥분하십니까? 9시 뉴스는 보지 마십시오. 흥분해서 심장이나 뇌혈관에 큰 손상이 우려됩니다.

  • 최성우 ()

      프로그래머 님이 분개하신 그 국회의원에 대해 잠깐 말씀드린다면...  지난 2000년 총선 당시 시민단체들의 "낙선 및 공천반대 운동"에 밀려서 결국 소속 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고 결국 의원출마도 못했지요...  무식하고 성의가 없다 보니 그리 되었는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 Psychedeli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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