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전문가를 따돌리는 사회

글쓴이
정문식
등록일
2002-09-18 15:05
조회
3,163회
추천
0건
댓글
5건
<정동칼럼> 전문가를 따돌리는 사회 
 
열차 여행을 할 때면 쇠망치를 든 철도원이 기차바퀴 부분을 두드리는 것을 흔히 목격하게 된다. 검수원으로 불리는 이들이 금속성의 울림만 듣고도 차량의 이상 유무를 알아내는 능력을 갖고 있는 점에 대하여 일반인들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어느 보일러공이 고장난 보일러를 쇠망치로 두 번 두드리고 나자 보일러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 보일러공은 수리비로 5만원을 요구했다. 보일러공을 부른 사람은 망치로 두 번 두드린 것뿐인데 수리비를 너무 많이 받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이에 대해 보일러공은 이렇게 답했다. "망치로 한번 두드리는 데 500원씩, 두 번 두드렸으니 그것은 1,000원이고, 나머지는 제가 오랫동안 축적해 온 경험의 대가입니다".
전문성은 그 자체가 높은 가치를 창출할 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적 분쟁 해결의 탄탄한 초석이 된다. 우리 사회의 분쟁 해결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전문성 부족에 큰 원인이 있다. 분쟁 해결의 최후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소송에서도 전문가 부족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첨단산업 분야는 물론이고 전통적인 굴뚝산업조차도 기계 제작상 또는 제품 제조상의 결함 등을 권위있게 진단해 줄 전문가의 기근 현상이 뚜렷하다. 법관의 판단능력을 보충하여 판결의 설득력을 높여줄 제3의 판단기관인 감정인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소송사건들이 적지 않다.
다음주 초 발표될 특별재해지역 지정을 둘러싼 논란도 사실은 권위있는 전문가 내지 제3의 판정기관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특별재해지역 선정을 위해 피해 조사를 벌이는 정부 합동조사단이 조사 기준의 모호성과 전문성 부족으로 불신을 사고 있다. 주택의 피해를 면적 기준으로 산정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농작물 피해를 작물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면적 기준으로 산정하여 농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자연재해대책법과 그 시행령은 정부 합동조사단을 편성할 때 재해상황 조사에 관하여 전문능력이 있는 자를 선발토록 규정하고 있으나 조사 현장의 실태와는 거리가 있는 셈이다.
피해상황 조사의 객관성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이고 보니 특별재해지역이 선포되면 지정되지 않은 지역 주민의 반발이 있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정치권이 여야 동색으로 특별재해지역 지정에 선심 경쟁을 벌이는 속에 정부도 지역 주민의 반발이라는 부담을 의식하여 특별재해지역을 대폭 확대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한정된 예비비와 추경예산을 갖고 특별재해지역을 대폭 확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느 지역도 특별재해지역의 '특별'에 어울리는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될 뿐이다.
112일째 지속되던 병원노조 파업에 대하여 공권력이 투입된 것도 제3의 판정기관인 노동위원회의 중재.조정이 주효하지 못한 탓이다. 분쟁 해결의 실패는 노.정 충돌 등 갈등구조를 증폭시켜 고비용 저효율의 굴레에 빠지게 한다. 공정성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권위있는 제3의 판정기관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사회에 분쟁 해결의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정에 이끌리는 삶의 형태가 그러하고, 합리주의의 전통도 부족하다. 사실 합리주의란 사물의 이치에 부합하도록 생각하는 것인데, 그것은 세상과 인간성의 양면에 대한 서글픈 눈뜸이다. 요즘들어 대학의 인문학과와 자연계 이공계 등을 지원하는 학생 수가 대폭 감소하는 현상이 생긴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통속적인 제너럴리스트가 성공의 월계관을 쓰는 확률이 높은 풍토에서 전문가가 설 땅은 없다. 한 우물만을 파는 외골수 인생과 장인정신으로 통달한 사람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곳에서 국가의 총체적 역량은 결코 나아질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이미 고인이 된 불문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인 김현 선생의 글 한 구절이 의미있게 다가온다. "같은 목소리를 좋아하는 이 획일화의 시대에 자기 목소리로 작업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저는 획일화에 제일 확실하게 온 몸으로 버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가가 푸대접받고 천박과 통속이 대접받는 이 시대에 장인정신으로 버티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이 사회의 발전과 총체적 역량 확대에 기여하는 길임을 외치고 싶다.

강병국 / 변호사

좋은 글입니다. 왜 이공인들이 '전문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안팎의 요인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 소요유 ()

      100% 동감입니다.

  • 인과응보 ()

      합리주의란 사실을 기초로 이득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사회는 이득을 생각해가며 사실을 만들려하는 현상이 없지 않군요. 이익과 기득권이 더 중요한곳에선 전문가가 발을 디딜 틈이 없겠죠. 단지 잔심부름을 위한 머슴정도로나 의미있을까... -.-

  • 인과응보 ()

      합리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사실이 파악되면 해결방법이 나오죠. 그후에 각자의 이해타산이 계산되고요. 하지만 우리현실은 이순서가 거꾸로 되어버린 일이 많습니다. 병풍사건, 공적자금문제, 천문학적 규모의 태풍피해등등... -.-

  • 정문식 ()

      근대 유럽 사상사를 돌이켜 본다면 인과응보님이 강조하신 '합리주의'를 내세우기 위해 수많은 천재와 철인들이 밤을 새웠다는 점을 알게 될 것입니다. 데카르트, 볼테르, 로크, 칸트, 루소 등등... 물론 흄이나 니체와 같이 '합리주의'를 반박하고 인간의 '본능'을 강조한 사상가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근대사는 '합리주의'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과학기술의 파탄이라는 반시대적인 사태가 벌어지고 있어 답답할 뿐이군여...

  • 노박 ()

      누가 그러더군요...한국에서는 수학, 과학, 논리학에 대한 교육을 할 필요가 없다고요...



자유게시판

게시판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추천
622 [제안] 대선후보들에게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질의서를 보냅시다 댓글 7 양신규 09-19 2990 0
621 [한겨레 게시판] 교육에 대한 경험담 댓글 3 정문식 09-19 2867 1
620 [연합뉴스] '정부출연기관 여성연구원 비율 8.4%' 소요유 09-19 2860 0
619 [연합뉴스] "< 국감현장 >-정무위 " 소요유 09-19 2608 0
618 [펌] 진짜 깨는군 댓글 3 SoC 09-19 3893 0
617 미국 포스트닥 과정, 석박사 과정의 현실? 댓글 9 양신규 09-19 9532 0
616 [연합] '정부출연연 비정규직 비중 절반 육박' ; 으아... 댓글 5 김덕양 09-19 3681 0
615 정부의 이공계 유학지원 세부 정책 제안!! 댓글 3 김덕양 09-19 3092 0
614 [조선] 네티즌, 과기부 국감 온라인중계에 무관심 댓글 4 이공계2 09-19 3174 0
613 [조선일보]“하이닉스 독자생존論은 국수주의” 댓글 2 백수 09-19 2742 1
612 [촌평초안] '한국생명과학 발전연구회'의 참신한 시도에 박수를 보내며... 댓글 10 sysop 09-19 2977 0
611 [과기부]주요 과학기술정책 현안 설명자료 댓글 5 Myth 09-18 2814 0
610 [연합뉴스] "< 국감현장 >-과기정위 " 소요유 09-18 3212 0
609 답변글 [연합뉴스] "< 국감현장 >-과기정위 (종합)" 소요유 09-19 3436 0
608 여러분의 도움을 기다립니다. 배성원 09-18 3104 1
열람중 [경향신문] 전문가를 따돌리는 사회 댓글 5 정문식 09-18 3164 0
606 답변글 [re]전문가를 요구하지 않는 사회 댓글 3 고영회 09-18 2853 0
605 [전자신문]김대중 대통령 특별회견 Myth 09-18 2927 0
604 [중앙]"붉은악마식 과학 개혁 해낼 것" 댓글 6 Myth 09-18 3276 0
603 [연합] 이공계학생 46%"전공 바꿀생각 있다" 댓글 2 박상욱 09-18 2984 0


랜덤글로 점프
과학기술인이 한국의 미래를 만듭니다.
© 2002 - 2015 scieng.net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