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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귀족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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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n 작성일2004-05-27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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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귀족의 나라/ 홍세화


이 나라는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사회귀족의 나라’다. ‘주권재민’은 허울 뿐이고, 사회상층 집단이 이 나라를 지배하는 진짜 주인들이다. 과거 신분사회 귀족이 공, 후, 백, 자, 남작으로 나뉘었다면, 한국의 사회귀족은 정치, 경제, 경영, 교육, 법조, 언론, 종교 등 사회 부문별로 나뉘어진다. 이를테면, 장상 전 총리지명자는 ‘교육귀족’이고, 장대환 현 총리지명자는 ‘언론-경영귀족’이며,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는 ‘법조귀족’에서 ‘정치귀족’으로 변신한 경우다. 과거 양반은 몰락하기도 했던 반면에, 이들은 일단 귀족 반열에 오르기만 하면 뛰어난 치부 능력과 혈연, 지연, 학연에 힘입어 결코 몰락하지 않는다. 과거 양반보다 더 신분귀족적인 것이다.

정, 관료계나 공기업 등 국가부문만을 장악한 프랑스의 ‘국가귀족’과 달리, 한국의 사회귀족은 누구에게도 견제받지 않는 특권적 지위를 누린다. 자기성찰이 부족하니 안으로부터 견제받지 않고, 정치-언론, 경제-언론, 정치-경제, 교육-언론 등의 유착으로 옆으로부터도 견제받지 않으며, 지역패권주의와 흑색선전, 그리고 색깔론에 매몰되어 비판능력을 상실한 ‘아랫것들’에게서도 견제받지 않는다. 사회귀족 사이에 헤게모니 다툼을 벌이긴 하지만, 그것은 그들 사이의 잔치일 뿐이다.

안, 옆, 아래 그 어디로부터도 견제받지 않는 한국의 사회귀족이 “군림하되, 책임지지 않는” 뻔뻔함을 특징으로 갖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교육귀족은 자식은 미국 땅에서 교육시키면서 이 나라의 교육 챔임자로 군림하고, 병역미필율에서 아랫것들의 열배에 이르는 높은 비율을 자랑하는 언론귀족, 법조귀족, 정치귀족일수록 국가보안법 폐지에는 쌍수를 들어 반대한다. 그들은 허원근 일병의 그 억울한 죽음과 끔찍한 은폐과정에 분노도 책임도 느끼지 않는다. “전쟁 한 번 해요”도 전쟁은 ‘아랫것들이 하는 것’이라는 의식, 무의식의 반영일 것이다.

골프, 부동산 투기 이외에 미국에 유학했거나 미국을 든든한 배경으로 둔 동질성을 갖는 그들은 영어를 잘하는데, 유독 ‘Republic(공화국)’이 라틴어 어원에서부터 ‘공(Public)’ 개념을 전제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공화국 시민의 기본 요건인 병역과 납세 의무를 잘 지키기는커녕, 병역비리 의혹을 사고 탈세를 저지르며 나랏돈을 맘대로 주무른다. 재산 형성, 거액은행대출, 위장 전입 등 사적이익 추구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장대환 언론경영귀족을, 1996년 총선에서 안기부 예산 중 6억8천만원을 선거자금으로 받았고 총선시민연대의 낙선 명단에 속했던 인물로서 “명문학교를 나온 좋은 가문 출신의 훌륭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 -얼마나 귀족적인가- 하순봉 정치귀족이 검증한다는 해프닝이 벌어지는 것도 사회귀족의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진정한 공화국이라면 시민의 자격에도 미치지 못한 사람이 공화국 수장이 되겠다고 나선 일이 진풍경이 되지 않는 것은 일제부역자를 할아버지로 모시고 군사독재자를 아버지로 모신 교육귀족들과 족벌언론귀족들의 덕이라 할 것이다.

헤게모니 다툼에 너무 바빠 ‘아랫것들’의 처지에는 관심 줄 틈이 없다. 수해 입은 경남지역 농민들의 고통에도, 파업 3개월을 넘긴 병원노동자들의 고통에도, 임차상인들의 눈물에도 시선을 주지 않는다. 하긴 의문사한 죽음들에 무관심한 그들에게 산 사람의 고통쯤이랴. 게다가 신분이 다르지 않은가.

차라리 사회귀족들에게 귀족칭호를 주도록 하자. 그래서 가슴마다 귀족 휘장을 ‘주홍글씨’처럼 달고 다닐 것을 공화국 법으로 강제하자. 그러면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조금은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홍세화/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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