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폴레옹과 3인의 수학자"...

글쓴이
최성우
등록일
2003-01-14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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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차기 정부의 각료들로 어떤 인물들이 채워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이트에서도 '장관추천' 란이 열렸고, 과학기술 관련 부처들은 특히 우리 회원들의 관심도 클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런데 서양 역사를 보면, 정치권과 관련을 맺었던 과학자들 중에서도 상당히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참고로 나폴레옹 시대의 몇명의 수학자에 대한 글을 아래 첨부합니다.

아래 글은 제가 첫번째 책 '과학사 X파일'을 내고 나서, 그 후속편 격으로 썼던 글 중의 하나입니다만... 온라인에만 올렸고 아직 책으로 출간하거나 다른 매체에 발표하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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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정치(1) - 나폴레옹과 3인의 수학자

최 성우 (과학평론가; hermes21@nownuri.net)


역사가들은 저명한 지식인들을 평가할 때, 그들의 업적 못지 않게, 지조나
신념의 일관성 여부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일제침략기 이후 최근
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근, 현대사를 돌이켜 보았을 때, 숱한 '변절한 지식
인'들의 사례가 많음은 우리 역사의 또 다른 아픈 부분이기도 하다.
과학사를 돌이켜 볼 때도, 과학자들 역시 당대의 지식인의 한사람으로서,
정치적 격변기에 있어서 대처하는 방향이나 처세가 각기 천차만별이었다.
끝까지 일관된 신념과 정치적 지조를 지키다가 불행하게 삶을 마친 사람들
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유지하고자 능수 능란하게 변
절과 변신을 거듭한 이들도 적지 않다.

특히 프랑스 대혁명 전후로부터 나폴레옹 시대를 거쳐 부르봉 왕정 복귀
에 이르는 시기는, 프랑스에서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일 뿐 아니라, 과학기
술 부문에 있어서도 엄청난 변혁을 몰고 왔던 중요한 시기이다. 위대한 화
학자 라부와지에(Antoine Laurent de Lavoisier; 1743-1794)가 자코뱅 급진
파에 의해 '반동적 과학자'로 몰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일이 있었는
가 하면, 미터법의 제정에 힘입은 도량형의 통일, 전문 과학기술교육기관인
에콜 폴리테크닉의 설립 등의 교육제도의 개혁, 군사기술을 포함한 여러
기술분야의 급속한 발전 등 주목할만한 변화들이 매우 많다.
이 시기에 나폴레옹과 각기 관련을 맺은 저명한 수학자 세 사람-몽주, 라
플라스, 푸리에-의 엇갈린 운명과 대조적인 처신을 살펴보는 일도 나름대
로 의미가 있을 듯싶다.

몽주(Gaspard Monge; 1746-1818)는 젊은 시절에 화법기하학(畵法幾何學)
을 창시한 것을 비롯해서 수학의 제도화에 큰 공헌을 하였고, 나폴레옹 시
대에 그의 핵심적인 과학참모 역할을 했던 중요한 인물이다. 몽주는 1746
년 프랑스의 한 시골 읍에서 가난한 행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기하학과 기계조작 등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주위사람들을 놀라
게 하였고 공병사관학교에 진학 추천되기도 하였으나, 신분이 낮았던 그는
정식 장교는 될 수 없는 별과에 입학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학교
는 귀족 등의 상류계급 출신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이 무렵
부터 그가 경험한 신분적 차별은 후에 그가 프랑스 대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입학후에 그는 입체를 몇 개의 평면에 투영하여 표현하는 화법기하학을
고안하였고, 능력을 인정받아 공병학교의 조교수로 채용되어 학생들에게
새로운 수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몽주는 이후 파리 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어 당대의 저명한 수학자, 과학자들과 교분을 맺으며많은 저서와 논문
을 저술하는 한편, 수력학 연구소장과 해군사관학교 교수직 등을 역임하였
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곧 자코뱅당에 가입하여 혁명과정
에 열렬히 참여하였고, 혁명정부 아래서 해군장관을 거쳐 군수공장의 총책
임자가 되어 새로운 군사관련 기술의 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혁명정부가
과학기술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전문교육기관으로서 에콜 폴리테크닉
을 창설하자 그는 그곳의 교수가 되어 후진양성에 힘썼고, 이후 나폴레옹
이 득세한 후에는 그를 따라 이집트원정에도 참가하였다. 나폴레옹 정권
하에서 몽주는 에콜 폴리테크닉 교장, 상원의원 등으로 계속 승승장구하면
서 나폴레옹의 중추적인 과학고문 역할을 수행하였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후에는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종 되뇌르(La Legion d'honneur) 훈장
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몰락과 더불어 몽주 역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유럽자유전쟁 때에 그는 67살의 나이로
적에 대항하고자 방위군을 조직하여 항전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파
리는 함락되고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자 몽주는 다시 희망을 걸었으나, 백일천하로 끝나고 워털루의
패전으로 나폴레옹은 결국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어 부활한
부르봉 왕조는 몽주를 적으로 간주하여, 그를 모든 공직에서 추방해버렸다.
그는 왕당파의 추적을 피해 빈민굴을 전전하다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하여
치매상태가 되어 72세의 나이로 비참한 최후을 맞았다.
몽주는 나폴레옹에게 모든 충성을 바친 만큼 그가 몰락한 이후에도 지조
를 잃지 않았고, 결국 나폴레옹과 운명을 같이 했던 것이다.

라플라스(Pierre Simon Laplace; 1749-1827)는 뉴튼의 고전역학을 계승,
발전시킨 수리물리학의 대가로서, 흔히 '프랑스의 뉴튼'이라고 불리는 인물
이다. 그가 남긴 "우주의 모든 물체들의 초기조건을 알고 그것들에 적용되
는 운동방정식(미분방정식)을 동시에 풀 수 있다면,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
들을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은 이후 근대사회의 세계관이 된 기계적 결정
론의 패러다임을 대표한다. (물론, 20세기 들어 양자역학과 카오스이론의
출현으로 이런 세계관은 철저히 무너지긴 했지만...)
라플라스는 프랑스 북부지방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은 어려웠
으나 그는 수학에 특출한재능을 보였기 때문에 독지가의 후원으로 상급학
교에 진학할 수 있었고, 대학을 나온 후 파리 육군사관학교의 수학교수로
부임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로 파리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어 많은 논문
을 저술하였다.

라플라스는 그 무렵의 다른 수학자들과는 달리 프랑스 대혁명의 과정에
는 그다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혁명정
부와 뒤이은 나폴레옹 정권 하에서 계속 중용되었다. 1799년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제1통령이 되자 그는 내무장관으로 입각하였으나, 행정능력이 전
혀 없었으므로 반년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훗날 나폴레옹은 그를 평하여,
"수학자로는 최고였으나 행정관으로는 낙제였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질구레한 일에만 간섭하는가 하면, 수학의 무한소(無限小)의 원리
를 행정에까지 적용시키려 들었다." 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라플라스는 그 대신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고, 상원부의장을 거쳐
나폴레옹으로부터 백작의 작위도 수여 받았다. 라플라스는 그의 대표적 저
서 '천체역학론'을 완성하여 나폴레옹에게 바쳤는데, 이때 나폴레옹이 "그
대는 우주의 체계에 관해 이 같은 대저서를 저술했으면서도 왜 우주의 창
조자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는가?" 라고 묻자, 그는 "각하, 저
는 그같은 가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천체역학론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책을 저술했을 때에도
나폴레옹에게 바치는 헌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하고 유럽동맹군이 파리로 입
성하자, 라플라스는 재빠르게 나폴레옹의 퇴위에 찬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부르봉 왕조가 부활하자 그는 루이18세의 무릎 아래 엎드려 충성을 맹세하
였고, 이후 출간된 천체역학론 재판본에서는 나폴레옹에게 바치는 헌사 부
분은 루이18세에게 바치는 헌사로 바뀌게 되었다. 그 덕택에 그는 복고 왕
정시대에도 높은 지위를 잃지 않았고, 출세하여 후작의 지위까지 얻었다.
라플라스는 프랑스 혁명기의 수학자들 중 '시대의 조류에 맞춰서(?)' 가장
약삭빠르게 처신한 덕택으로 화려하고 평온한 생애를 보냈으나, 그의 변절
과 배반, 지조 없음은 후세 사람들에게서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되기도 한
다.

푸리에(Jean Baptiste Joseph Fourier; 1768-1830)는 열전도 이론으로 유
명한 수학자이며, 그가 제시한 이른바 '푸리에 급수'라는 수학적 수단은 오
늘날에도 광학을 비롯한 물리학, 여러 공학 분야에도 널리 응용되는 중요
한 것이다. 푸리에는 양복가게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고아가 되어서,
사원의 성직자에게 양육되고 교육을 받았다. 역시 어릴 적부터 수학에 뛰
어난 재능을 보였던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신분상 불가
능하였고, 수도사의 길을 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수도원을 나왔고, 파리로 가서 혁명의 과정에 계속 열렬히 동참하였다.
혁명정부 아래서 그는 에콜 폴리테크닉의 수학교수가 되었고, 이후 나폴
레옹의 이집트 원정시 몽주와 함께 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
다. 푸리에는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돌아간 후에도 이집트에 남아서 일하다
가, 귀국 후 이제르 현의 지사로 임명되었다.

그후 푸리에는 나폴레옹 정권아래서 오래도록 지사를 지냈고 남작 작위까
지 받았으나, 나폴레옹이 실각하여 엘바 섬에 유배되자 루이18세에게도 충
성을 맹세하여 그 자리를 보전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
하여 파리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그는 나폴레옹군에게 체포되었고, 다시 부
르봉 왕조에 대한 서약을 버리고 나폴레옹에게 충성하기로 서약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폴레옹의 부활이 백일천하로 끝나자, 루이18세는 푸리
에의 변절을 괘씸하게 여겨 모든 공직에서 그를 추방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한때 생계가 곤란한 지경에까지 빠졌으나 옛 제자의 도움으로 통계국
장으로 부임하였고, 이후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어 그럭저럭 평온한 만년을
보냈다.
푸리에는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도
리어 배척을 받는 등, 어찌 보면 불행한 사람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
다.

  • 환비 ()

      그 유명한 라플라스와 푸리에에게 이런 뒷얘기가 있었다니.. ㅡ.ㅡ; 전공책만 보면 "저 인간들은 뭐 먹고 저런걸 만들었을까?" 하면서 천재에 대한 부러움과 감탄을 했는데,,,흠~ 역시 사람은 다양한 측면에서 판단할 필요가 있는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최성우님의 글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

  • 소요유 ()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많이 배웁니다.

  • 배성원 ()

      공통적으로 수학자들이 매우 중용돼어 쓰인 인물이란 것을 알수 있군요. 우리나라의 경우, 군사정권하에 군인들이 쓰인 적이 있을 뿐, 모조리 문사들의 나라지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 수학자'라는 직업 내지 학문분야기 있어본 적도 얼마 돼지 않았고 더우기 수학자가 장관자리에 오른 적도 없습니다. 혹시 있을까요?

  • Haskell ()

      으음...^^ 글 재미있네요... 라플라스, 푸리에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는데...^^ 헤헷;;;

  • 트리비어드 ()

      푸리에는 참 재미있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약삭빠르게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지조를 지키지도 못한 전형적인 '일반인'이네요. 하지만 변절이후 나폴레옹군에 다시 체포된 푸리에를 나폴레옹이 눈감아 주었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었는데 주어진 임무에 대해서는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행정관이었나 봅니다.

  • 소요유 ()

      좀 다른 이야긴데, 학교 미술책이나 역사책에 나오는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나오는 조선시대 초상화로는 대표적적인 '윤두서'라는 분이 생각납니다. 아시다시피 이분이 윤선도의 손자인가하는 분인데, 일전에 해남에 있는 윤선도의 종가집에 마련된 박물관을 찾아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 박물관에 정치가인 이 윤두수라는 분의 유명한 초상화와 함께 그의 평생 문집과 사용했던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 소요유 ()

      이 양반의 유물을 보고 놀랬던 것이 수학과 천문학 등을 비롯하여 실용학문을 아주 깊숙히 했더군요. 또 재미있는 것은 밀정을 보내서 일본 전국의 지도를 그린 것이 그 유물관에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저로서는 당시 주류는 아니었지만 실학이라는 것이 어느정도 깊이까지 진행되었는가에 대하여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더군요.  들은대로 맨날 당파싸움만 하던 선비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그 무엇인가를 느끼고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다산어보"인가요, 왜 바다 생물도감도 이 가문에서 만들었죠?  자신의 학문에 역사적 뿌리가 없어서 고민하시는 분들은 한번 해남에 가셔서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 김세훈 ()

      '자산어보'이고 저자는 윤씨집안 사람이 아니라 '다산 정약용' 선생의 형인 정약전 선생이 흑산도에 15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쓴 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소요유 ()

      앗, 그런가요?  죄송~   

  • 김진구 ()

      일전에 제가 올렸던 글에 등장하시는 교수님께서 푸리에에 대한 위의 일화를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셨는데, 여러모로 보나 서글픈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 내적인 부분도 그렇고 우리의 현실과 빗대어 볼 때도 그렇구요. 살아남기 위한 열정이 위대한 수학자를 만들었을까하는 의문이 문득 듭니다.

  • 박용화 ()

      박정희의 구테타 혁명과 과학기술자 등용, 카이스트, 키스트 설립등이 생각나는 군요. 당시 외국의 우수 두뇌들을 많이 유치 하고 정근모 박사님은 장관도 하셨죠. 지금은 학계로 돌아가셨지만.. 이태섭 전 국회의원도 그당시 유치 과학자중의 한분이셨는데, 정치적 이유로, 지금은 정치를 그만두셨죠. 프랑스 혁명 당시 수학자를 비롯한 과학자들과 박정희 정권의 과학자들이 수백년의 시간차가 있지만, 권력의 변화에 따라 영향을 받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 박용화 ()

      윗글 카이스트->카이스 (카이스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카이스와 키스트를 통합해서 만든 것이죠)

  • 최성우 ()

      움, 덧글들을 많이 올려 주셨네요...^^  몇가지 답변 비슷하게 드린다면...  유럽의 과학계에서 17-18세기는 (대략 19세기 초까지...) '수리물리학의 시대'라고 불릴만큼 그 분야가 급속하게 발전했고 수많은 물리학자 (겸 수학자)들이 활약을 했던 시기이지요...  위에서 거론된 사람들 이외에도, 라그랑쥐, 오일러, 가우스 등 쟁쟁한 인물들이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 최성우 ()

      그리고,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수많은 수학자(물리학자)들이 자발적으로 혁명의 과정에 열렬히 동참했고, 그에 따라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중요한 일들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것을 우리나라 박통 시대의 과학자 드라이브와 연결시키는 것은 약간 무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권 혁 ()

      그래도 최소한 과학이 중요하다는 눈은 있었네요. 아무리 독재자라 하더라도요. ^^ 나폴레옹과 라플라스와의 대화에서 무한소얘기까지 나온거 보면..프랑스에서 수학은 우리의 수학과는 조금은 다른 분위기 였나봐요. 그리고 또하나 느끼는 건데 너무 공부들만 해서 그런지..과학자들은 참 잘 이용 당하는 것 같아요. 삼국지랑 로마인이야기를 읽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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