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라브와지에의 비극"

글쓴이
최성우
등록일
2003-01-21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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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손님게시판에도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듯한 글들이 올라왔는데...   이런 얘기를 들으면 아마도 '언제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자들이 책임을 질 만한 위치에 있기라도 했는가?" 혹은 "뭐 크게 틀린 얘기는 아닐지 몰라도, 지금 우리 코가 석자인데...^^"  라고 반문하실 분들도 많을 줄로 압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과학기술자 (혹은 예비 과학기술자)들도 과학기술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해서도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사실 오늘날의 과학기술계 위기상황도, 그동안 기득권을 누려 온 과학기술자들이 자신들의 위치에 걸맞는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또한 지식인의 일원으로서 우리사회에서 옳바로 발언하거나 참여해오지 못한 데에서 일정 정도 기인하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이라고 해서 꼭 연구결과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책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좋은 연구개발 업적과 성과를 내서 국민을 먹여 살리는 것, 그리고 '이공계 기피현상'을 극복하고 나라를 살리는 일 또한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다 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참고로, 아래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프랑스의 화학자 '라브와지에'에 대한 글을 첨부합니다...

===========================================================

           "라브와지에의 비극"  

                          최성우 (과학평론가; hermes21@nownuri.net)
                          - '과학사 X파일(사이언스북스)' 中 에서 -


연소이론으로서 '플로지스톤이론'을 깨뜨리고, 산소결합설을 확립했으며, 질량보
존의 법칙을 발견하는 등, 화학 전반의 기초를 세워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고
추앙받는 프랑스의 대화학자 라브와지에(Antoine Laurent de Lavoisier;
1743-1794)는 프랑스대혁명의 소용돌이가 한창이던 1794년 5월8일, 사형을 선고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 51세로,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 한창
일할 수 있는 아까운 때에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훌륭한
과학자를 단두대로 몰아 넣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라브와지에의 아버지는 부유한 변호사였으며, 그 덕택에 그 역시 쉽게 귀족이
될 수 있었다. 대혁명 직전의 당시 프랑스 사회는 부패할 대로 부패하여 귀족들
은 호의호식하면서 온갖 특권을 누린 반면, 대다수 평민들은 귀족의 횡포와 수
탈로 인하여 참담한 생활을 벗어 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든 돈만 내면 쉽게
높은 지위를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라브와지에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귀족의 지
위를 사 주었던 곳이다.
그는 1779년 36살의 나이로 세금징수관이 되었는데, 이 직위가 나중에 그를 단
두대에 오르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당시의 세금
징수관들은 정부를 대신하여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들이고 그 일부를 자
신들이 수수료 명목으로 챙겼는데, 국민들에게 비싼 세금을 부과하여 징수하였
고 잘 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혹독한 처벌을 내렸다.
한 명의 세금징수관 밑에는 수천명에 달하는 징수원들이 있어서 인정사정 가리
지 않고 세금을 거둬 들였고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하여 왕과 고관들에게  
뇌물을 주기도 일쑤였다. 당연히, 세금징수관과 징수원은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가장 미움을 받는 존재였고, 당시의 만화는 세금징수원들이 부인들의 시장 바구
니까지 들춰서 세금을 우려내는 모습을 풍자할 정도로 원성이 높았다.

라브와지에같은 탁월한 과학자가 왜 하필이면 대다수 국민들에게 공포와 저주
의 대상인 세금징수관이 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부유한 집안에
서 자란 그는, 여러 모로 고통받는 평민들의 실상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세금징
수관의 직위로 많은 돈을 벌어서 자신의 실험과 연구에 이용하려는 단순한 생각
만 하였는지도 모른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고 이후 세금징수관제는 폐지되었으며, 갈수록
혁명의 물결은 급진화하여 자코뱅 산악파가 집권한 후로는 모든 세금징수관들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1794년 5월부터는 로베스피에르(Maximillien Robespierre;
1758-1794) 등의 공포정치 아래서 세금징수관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재
판장은 코피나르라는 과격한 인물이었다. 그는 라브와지에가 세금징수관으로서
프랑스국민들로부터 온갖 착취와 수탈을 일삼았으며, 국가에 납부하여야 할 많
은 돈을 횡령하였다고 몰아 붙였다.

라브와지에는 대혁명 전인 1775년부터 국립 화약공장의 감독관으로 일하면서
화약의 개량 등으로 국가에 공헌한 점과 혁명정부 아래서도 미터법의 제정에 관
여한 것 등을 들어서 정상참작을 호소하였고, 자신의 중요한 실험을 위하여 재
판을 2주일만 늦춰 달라고 청원하기도 하였으나, 코피나르는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코피나르가 실제로 그런 말을 하지
는 않았다는 설도 있으나, 당시 쟈코뱅 집권파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세금징수관들에게 교수형이 선고되었고, 라브와지에 역시 1794년 5월
8일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그가 죽고 난지 불과 두 달 후, 공포정치의
중심인물인 로베스피에르 역시 실각하여 코피나르와 아울러 처형되었고, 많은
과학자들은 라브와지에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특히 유명한 수학자 겸
물리학자인 라그랑지(Joseph Louis Lagrange; 1736-1813)는 "그의 머리를 치는
데에는 1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와 같은 머리를 다시 만드는 데에는 백년이
걸려도 부족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당대의 위대한 화학자의 죽음을 아쉬워하였
다.

라브와지에의 비극적인 죽음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하여, 오늘날에도 우
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그의 죽음을 '과학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
한 민중들의 무지와 분노가 빚어낸 어처구니 없는 결과' 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
면 '착취받는 민중들의 고통을 외면했던 오만한 과학자의 자업자득격인 말로'로
해석해야 할까? 그의 죽음은, 한 세금징수관에 대한 처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
니라, 당시의 과학을 '지식귀족들에게 독점되고, 대다수 민중을 수탈하는 과학'
이라고 규정하고, '새로운 민중의 과학'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쟈코뱅혁명주
의자들의 사고와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이와 비슷한 사조는
그 이후에도, 과학의 발전에 의한 폐해가 지적될 때마다 간간이 역사상에 등장
한 바 있고, 때로는 반(反)과학주의로 나아가기도 한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 및 눈부신 성과 못지않게, 그로 인한 부작용과 폐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또한 높은 오늘날, 바람직한 과학관의 정립 및 과학과 사회
간의 올바른 상호 이해,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등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것들
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몇 년 전, 여러 저명한 과학기술자들에 대해
무자비한 폭탄 테러를 일삼았던 미국의 유너보머(Unabomber)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역사가 들려 주는 교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역사를 반복한다
는 말처럼, 우리가 과학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한 조명을 게을리한다면, '라
브와지에의 비극'은 앞으로도 되풀이될지 모른다.

  • prism ()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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