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공대 임경순교수] 한국 현대과학기술사

글쓴이
로켓연구가
등록일
2002-10-05 07:07
조회
5,347회
추천
1건
댓글
0건
한국 현대과학기술사
--------------------------------------------------------------------------------
이글은 임경순교수(과학사, 포항공대 교양과정부)가 삼성사외보, [인제제일]에 [한국의 과학기술사]라는 제목으로 기고하고 있는 글의 첫 회의 글입니다. 일제시대부터 현대까지의 한국의 과학기술을 개괄하는 글로 현재의 한국에서의 과학기술체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

한국의 과학기술사 (1)
- 해방전후 계속되는 시련으로 불안한 태동기

 우리나라의 근대 과학기술은 광무개혁 기간인 1899년 근대적인 과학기술 교육기관인
관립상공학교 관제가 반포되는 것을 기점으로 해서 시작되었다.
이때를 전후해서 한국인들이 일본에서 전문학교 수준의 과학기술 교육을 받고 돌아오기
시작했으며, 1900년에는 광무학교도 세워지게 된다.

 관립상공학교는 1904년 관립농상공학교로 개편되었다가, 마침내 1906년 관립공업전습소로 개편되어
근대 초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과학기술 교육기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관립공업전습소에서는 직물업, 제지업, 요업 등의 농촌 재래 수공업품의 제조법을 중점적으로 교육했다.


 과학교육 억제되었던 일제강점기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고급 과학기술 인력은 전적으로 본국으로부터 공급받도록 하고 조선인에게는 과학기술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식민지 과학기술 교육정책을 취했다. 때문에 일제하에서 한동안 대학이 설립되지 못했고, 일본 유학을 통한 이공계 대학의 배출도 1920년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차단되었다.

1915년에 이르러서야 총독부는 조선인들의 악화된 불만을 완화시키고 대외적인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 경성공업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해주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1915년 일본인과 조선인의 공학 형태를 띤 경성공업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경성공전은 1922년 경성고등공업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44년 경성공업전문학교로 바뀌어서 해방을 맡게 되는데, 일제하 대표적인 과학기술 교육기관이었다.

애초에 이 학교는 일본인보다 조선인을 더 많이 뽑는다고 표방했지만, 조선인의 다수를 입학 뒤 중도에 탈락시킴으로써 사실상은 일본인을 더 많이 배출하는 학교로 바뀌었다. 설립초기에 경성공전은 염직과, 요업과, 응용화학과, 토목과, 건축과, 광산과에서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된 1938년에 기계공학과 및 전기공학과가 추가되었다.

1917년에 신설된 연희전문학교 수리과(수학 및 물리과)에서 루퍼스(W.C.Rufus, 1876-1946), 벡커(A.L. Becker, 1879-1979)와 응용화학과 학과장에 임명된 밀러(E.H. Miller, 1873-1966) 등 비교적 충실하게 가르칠 수 있는 교수진 덕분에 1919년 4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이원철은 북장로교로부터 학비지원을 받아 미시간 대학에서 천문학을 공부해서 마침내 1926년 조선인 최초의 이학박사가 되었다.

연희전문의 수리과(후에 수물과, 이과라고도 불리움)의 경우는 대부분의 학생이 한국인이었고, 비교적 우수한 교수진 덕분에 일제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250여 명이 넘는 많은 졸업생을 배출해서, 훗날 우리나라의 과학발전에 좋은 밑거름 역할을 하게 된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총독부는 조선인들이 공업학교를 설립하는 것에 대한 규제를 다소 완화해 주었다. 이에 따라 몇몇 공업전문학교들이 설립되었다. 그 중에서도 광업가 이종만을 중심으로 각계의 조선인 후원이 바탕이된,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폐교된 것이 인연이 되어, 1938년평양에 설립된 대동공업전문학교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학교는 전시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약 300여명의 조선인 채광야금학 전공자를 배출했다. 한편 1939년에은 일본인 광업가의 기부금으로 관립 형태인 경성광산전문학교도 설립되었다.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과학기술인력 공급이 다급해진 일제는 1941년

에 와서야 경성제국대학에 이공학부를 신설했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에서

는 물리학, 화학, 토목공학, 기계공학, 응용화학, 채광야금학 등의 학과가 설

치되어 대부분 일본인 교수들에 의해서 강의가 이루어졌다. 해방 전까지 이

곳을 졸업한 조선인 수는 총 37명이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해외 유학 출신에

비해서도 매우 적은 인원이었다. 해방이 된 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와 경

성고등공업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가 모태가 되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만

들어지게 되었다.


이념대립으로 잃은 우수 과학자들

일제는 조선인 고급 과학기술 인력에 배출을 될 수 있으면 억제했기 때

문에 일제하에서 배출된 과학기술 분야의 조선인 박사학위 소지자는 전부

다해야 12명이었으며, 이공계 대학 졸업자도 고작 300여 명에 불과했다. 해

방 직후 경성제국대학의 이공학부는 당시의 몇 안되는 박사학위 소지자였던

이태규, 이승기, 발철재 등이 주축이 되어 한국인에게 인계되었다. 박사가 몇

안되는 관계로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훗날 김일성대학 총장이 되는 도상

록, 역시 일본 도쿄제국대학 응용화학과를 졸업하고 경방에서 공장장으로 일

했던 김동일, 일본 교토에서 우주선(宇宙線) 물리학 분야를 공부했던 권영대

등 학사 출신들도 이 당시에는 커다란 역할을 했다. 한편 일제 말기 총독부

가 빼앗아 간 연희전문학교는 이원철 등에 의해서 접수되어 기존에 있던 수

물과가 수학과, 물리학과, 화학과로 분리되었다.

1946년 8월 22일 국대안(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방안)이 공포되고

이에 따라 서울대학교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국대안은 좌우익 대립이라는 당

시의 국내 사정과 휘말리면서 상당수의 과학자들이 대학을 떠나는 요인이

되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설립된 서울대학교에서는 문리과 대학 초대학

장에 이태규, 공과대학 초대학장에 김동일이 임명되면서 한국 과학기술의 새

로운 출발을 모색하게 된다. 하지만 곧 이어 6·25 전쟁이 발발해 많은 교수

진이 사망했고, 더욱이 이승기, 김양하, 도상록 등 비교적 유능한 과학자들이

월북하는 바람에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자 공동체는 커다란 피

해를 입게 되었다.

한편 1912년에 설치된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는 해방 뒤 중앙공업연구소

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상공부에 소속되는데, 초대 소장에는 경성고등고업학

교를 졸업하고 1929년 유지의 암모니아 강화 라는 논문으로 큐슈제국대학

응용화학과를 졸업한 뒤 1933년부터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에서 일해 온 안

동력(安東赫, 1906-?)이 임명되었다. 중앙공업연구소는 해방 직후 사실상 국

내 유일의 종합공업연구기관이었으며, 6·25 전쟁 이전까지 우리나라 과학기

술 연구를 주도했다. 초기의 연구원으로는 이순범, 전풍진, 신윤경, 성좌경,

한용석 등이 일했는데, 이들은 훗날 한국 화확계를 이끄는 주요 인물이 되었

다. 또한 초대 소장인 안동혁은 1953년 상공부장관을 지내는 등 우리나라 초

창기 과학기술 분야에서 많은 역할을 했다.

6·25 전쟁을 계기로 국방 과학기술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즉 국

방부과학기술연구소, 해군기술연구소, 육군과학기술연구소 등의 국방연구소

들은 1950년대에 우리나라의 중요한 과학 연구기관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는

비교적 좋은 연구시설 속에서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은 연구를 할

수 있었는데, 훗날 한국 과학을 대변할 과학자들이 젊은 시절 이곳에서 일하

게 된다. 하지만 화학적 수소폭탄 을 핵융합 수소폭탄으로 잘못 알고 극비로

많은 돈을 들여 연구를 진행시키는 등 웃지 못할 사건을 연출하기도 했다.


교수들의 유학으로 가르칠 사람 없었던 휴전 이후

한편 이 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한국인 과학자로서 육종학자 우장춘(禹

長春, 1898-1959)을 빼놓을 수 엇다. 우장춘은 일본 도쿄에서 구한국의 군인

으로 일본에 망명해 있던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사이에서 태어났

다. 그는 도쿄대학 농학 실과를 졸업한 뒤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근무하면서

페튜니와 나팔꽃에 관한 육종학적 연구 로 1936년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

사를 받는 등 이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과학자였다. 1950년 3

얼 그는 아버지의 조국을 위해 일하고자 귀국했다. 그 뒤 그는 농업과학연구

소(1953년 중앙원예기술원으로 개칭)의 초대소장을 맡으면서 1959년 8월 위

궤양과 복막염으로 사망하기까지 한국의 육종학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

다.

휴전 후 미네소타 계획에 힘입어 많은 교수들이 여러 형태의 기금을 이

용해서 미국과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교수들의 귀국이 늦어져서 배우는 학생들의 교육에 막대한 지장을 초

래했다. 즉 당시의 학생들은 많은 경우 스스로 학습 모임을 조직해서 독학을

하거나, 기껏해야 조금 앞서간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공부해야 하는 등

과학교육적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던 시기였다. 이리하여 1960년대

에 이르러서도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의 많은 대학들에서는 본격적인 과

학연구 분위기를 형성시킬 수 없었다.


---------------------------------------------------

-

해방 당시 천문학 및 물리학 분야 박사학위 소지자


이원철(李原喆, 1896-1963):

1919년 연희전문학교 수리과 졸업. 연휘전문 서양천문학 교수였던 벡커와

루퍼스의 주선으로 도미. 1926년 미시간 대학에서 독수리자리 에바별의 천

체에서의 운동에 관한 연구 로 천문학 박사. 1926년 연희 전문학교 교수. 해

방 후 초대중앙관상대장. 인하공과대학 초대학장.


조응천(曹應天):

1928년 인디애나 대학에서 최대전류 조건에서의 삼극진공관에 관한 연

구 로 물리학 박사. 해방 후에는 주로 전자공학 분야에서 일함.


최규남(崔奎南, 1898-1992):

1926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졸업. 1927년 도미하여 1933년 미시간 대학

에서 시안화수소의 적외선 흡수 스펙트럼 에 과한 연구로 물리학 박사. 1934

년 연희전문학교 교수. 1951년 서울대학교 총장. 1952년 창설된 한국물리학

회 초대회장. 1956년 문교부장관


박철재(朴哲在, 1905-1970):

1940년 교코제국대학에서 생호모(生護謀)의 결정화에 관한 연구 로 물리

학 박사. 한국물리학회 초대 부회장. 문교부 기술교육국장. 초대 원자력연구

소 소장.


해방 당시 화학 및 화학공학 분야 박사학위 소지자


이태규(李泰圭, 1902-1992):

1931년 교토제국대학에서 화학분야 이학박사, 1935년 교토제국 대학 화학

과 조교수, 1934년 교수. 1948년 유타대학 교수. 1973년 영국 귀국하여 한국

과학원 석자교수. 분자점성학, 액체이론, 반응동역하, 표면화학, Ree-Eyring

이론으로 유명.


최광:

1934년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시멘트 주요 성분에 대한 열역학적 연구

(화학공학)로 공학박사. 해방 후 귀국해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

소식이 없음


김양하(金良瑕):

1943년 도쿄제국대학에서 농예화학으로 농학박사.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근무 해방 후 귀국하여 좌익 운동을 하다가 월북했다.


이승기(李升基, 1905-):

1939년 교토제국대학에서 응용화학으로 공학박사. 해방 후 서울대학교 2

대 공과대학장을 지내고, 6·25 전쟁 때 북한으로 갔다. 1940년대 초반 석탄

으로부터 합성섬유 1호 개발. 1961년 북한 비날론 생산 주도. 1967년 영변원

자력연구소 소장. 1980년 과학원 함흥분원 원장. 현재 북한 과학계를 대표하

는 상징적 권위를 지닌 인물


조광하(趙廣河, 1905-1967)

1943년 오사카제국대학에서 알카로이드의 화학적 연구로 이학박사. 대한

화학회 7대회장.


신윤경(申允卿):

1945년 베를린 공대에서 4가티탄 과산화물의 구조에 관한 연구 로 화학

공학과 박사. 서울대 화학공학과 교수


가을인데, 나는 가을보다 빠르게 겨울이다.


한국 현대 과학기술사 (2)
-50년대말과 60년대

국가 주도로 과학기술연구 본격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과학기술 연구기관은 1959년에 설립된 원자력

연구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원자력연구소는 처음부터 이승만 대통

령의 각별한 관심 속에 설립되는데, 초창기 원자력 연구를 담당했던 원자력

원이 장관 급을 넘어선 부총리 급이었다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원자력연

구소가 구체적으로 설립되는 데는 당시 문교부 기술교육 국장이었던 박철

재와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서 원자력 과장을 맡고 있었던 윤세원이

깊이 관여했다. 박철재는 해방 당시 거의 드물었던 물리학 분야의 박사학

위 소지자로서 초대 원자력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게 된다.


과학기술계 이끈 원자력연구소

1965년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 열린 종합과학기술연구소 설치에 대한 공

청회 원자력연구소는 당시 국내의 유일한 종합과학연구소로서 연구원들에게

아주 파격적인 대우를 해 주었기 때문에, 원자력 분야라는 전공과는 상관

없이 다양한 과학 분야의 우수 인력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원자력연구소는

특히 원자력 연구생을 해외에 파견했는데, 1970년대 이후 한국의 과학기술

계를 이끌어 나갈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이 원자력연구소의 도움으로 해외

에서 과학기술을 배워 올 수 있었다. 1956년에서 1963년 8월까지 모두 189

명을 해외로 파견했으며, 그 뒤에 수가 좀 줄기는 했지만 지속적으로 많은

유학생을 해외로 내보냈다.

하지만 파견 유학생의 상당수가 학위를 마치고 귀국했다가 국내에 자리

가 없어 다시 출국했으며, 아주 귀국한 사람들도 대학이나 1966년에 설립

된 KIST에서 원자력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의 연구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

았다. 또한 1959년부터 1971년까지 11년 간 무려 9명의 소장이 바뀌는 등

정부 관료체제하의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한편 원자력원의 직제와 인원 구성은 1959년 완료되었으나, 곧이은 정치

적 격변으로 인해 원자로 건설이 지연되면서 초기에는 연구가 제대로 이루

어지지 못했다. 따라서 본격적인 원자력 연구는 1962년 3월 열출력 100㎾

급인 연구용 원자로(TRIGA Mark-II)가 가동되면서부터 가능하게 되었다.

연구용 원자로가 가동되면서 원자력연구소는 방사선 및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기초과학 부문 및 응용과학 부문에 대한 연구에 주력함으로써 1966

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설립될 때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종합 과학기술

연구소의 역할을 담당했다.

1962년 3월 연구용 원자로가 가동됨과 동시에 방사선의 의학적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방사성의학연구소가 생겨나게 되는데, 원자력원은 1962년

11월 26일 방사성의학연구실을 설치했고, 이것이 모체가 되어 1963년 12월

17일에는 방사선의학연구소가 출범했다. 방사성의학연구소에서는 암을 비

롯한 각종 악성종양에 관한 연구, 암환자의 치료 및 암의 조기진단사업 등

을 중점적으로 수행했다.

한편 원자력원은 방사선 및 방사성 동위원소의 농학적 이용을 기대하면

서,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각 대학의 농과대학과 농업시험장에 원자력 연구

비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1960년부터 농업시험장과 원예시험장에서는 방사

선을 이용한 종자 개량 연구가 수행되었고, 이런 연구가 모태가 되어 1965

년 4월에는 방사선농학연구실이 설치되었으며, 마침내 1966년 11월 30일

방사선농학연구소가 독립하게 되었다. 1973년 이들 원자력연구소, 방사선의

학연구소, 방사선농학연구소는 한국원자력연구소로 통합·민영화되었다.


과학기술 전담 기관 과학기술처 발족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에 박차를 가하면서 정부에서는 과학기술 업무를

전담할 기구를 설립했다. 이미 1961년 7월 경제기획원 내에는 과학기술 진

흥 업무를 전담하기 위한 기술관리국(초대국장 전상근)이 설치되었으며,

1964년 2월에는 과학기술 정책의 심의와 건의를 목적으로 하는 경제과학심

의회가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설치되었다. 이 부서들을 근간으로 해서 1967

년 4월 각 부처에 분산되어 있던 행정기구와 연구기관을 승격·통합하여

과학기술처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때 대통령 직속기관이었던 원자력원은

원자력청으로 개명·각하되어 새로이 신설된 과학기술처에 소속되었으며,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은 과학기술처에 흡수되었다.

초대 과기처 장관에는 김기형 박사가 임명되었는데, 그의 재직시에 우리

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과학기술 교육기관인 과학원 설립 작업이 추진되었

다. 더욱이 1971년 6월에는 원자력연구소와 KIST의 소장을 역임한 바 있는

최형섭이 제2대 장관이 되었고, 이에 따라 과학기술처가 중심이 되어 대덕

연구단지를 조성하는 등 정부의 본격적인 과학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한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설립

원자력연구소가 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의 한국 과학기술을 대표하는

연구기관이었다고 한다면, 6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과학기술을 대변한 종합

과학기술 연구기관은 1966년에 설립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였다. KIST가 설립되기 이전인 1962

년에 이미 문교부는 한국과학기술원 설치안을 마련했었다. 또한 1963년에는

국립공업연구소를 재단법인으로 개편하여 종합과학기술연구소로 육성하려던

경제기획원의 계획도 있었으나, 당시에는 국가의 재정이 곤란해서 실현되

지 못했다. 기관은 1966년에 설립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였다. KIST가 설립되기 이전인 1962

년에 이미 문교부는</td></tr></table> 한국과학기술원 설치안을 마련했었

다. 또한 1963년에는 국립공업연구소를 재단법인으로 개편하여 종합과학기

술연구소로 육성하려던 경제기획원의 계획도 있었으나, 당시에는 국가의

재정이 곤란해서 실현되지 못했다.

KIST는 한국이 베트남에 파병을 하는 대가로서 설립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65년 5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은 존슨 미국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미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여기서 한국과 미국 정부는 한국의 공업 발

전에 기여할 수 있는 종합 연구기관을 설립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 합의

에 따라 1965년 7월 미국은 당시 미국 대통령의 과학기술 특별고문이었던

호닉(Donald F. Honig)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한국으로 파견하게 된다.

호닉의 조사단은 그해 8월 비영리독립기관으로의 운영, 산업체와의 유대

강화, 양국정부의 확고한 재정지원 등 훗날 KIST 운영체계의 기본 골격을

이루게 되는 핵심적인 내용을 존슨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호닉 조사단의 건

의에 따라 미국 국제개발처(USAID)는 1965년 미국 정부를 대신해서 미국의

바텔기념연구소(Battelle Memorial Institute)와 연구소 설립을 위한 용역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리하여 KIST는 미국의 바텔기념연구소의 연구형태를 본떠서 만들어지

게 되었다. 미국의 바텔기념연구소는 미국에서도 아주 특이한 형태의 연구

소로서 산업계와 정부로부터 연구를 위탁받고 그 대가로 주어진 기금으로

운영되는 계약 연구체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한편 KIST 설립 준비 자문위원회에는 최규남 박사를 위원장으로 해서 김

용완, 박철재, 성좌경, 송대순, 안동혁, 이량, 이우용, 이종진, 장예준,

조순탁, 최규원, 최형섭, 한만춘, 한상준, 전상근(간사) 등 60년대를 대변

하는 한국 과학기술자들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KIST는 1966년 2월 10

일에 정식 발족했고, 초대 소장에는 원자력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바 있는

최형섭이 임명되었다. 그는 이미 1961년 9월 26일에 금속연료종합연구소라

는 민영연구기관을 창립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는데, 이 연구소에는 대

한중석, 대한석탄공사, 대한철광, 한국제련공사, 그리고 1966년부터는 인천

중공업 등이 공동으로 출연했다. 이 금속연료종합연구소도 KIST의 창립과

간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었다.


산업체 관련 분야 중점 연구

KIST는 설립된 지 3년 뒤인 1969년 10월 23일 드디어 연구소 건물이 준

공되었고, 이에 따라 외국에서 산업적 연구를 하는 유능한 과학기술자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등 본격적인 연구활동을 하게 된다. 당시 정부가 제2

차, 제3차 경제개발계획에서 중점 육성산업으로 채택한 산업은 철강 및 제

강공업, 전자공업, 기계공업, 석유화학공업 등 자본집약적이고 고도의 기술

을 필요로 하는 것과 다급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식품공업이었다.

이리하여 이 연구소에서는 식품공학, 재료공학, 전자공학, 화학공학, 기

계공학 등 산업체와 관련이 깊은 분야를 중점 연구하게 되었으며, 처음에

는 국가로부터 그리고 한국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산업체로부터 연구용역을

얻어 내 서서히 한국에서 정착해 나갔다. 예를 들어 1969년 KIST는 포항제

철 건설의 기술계획서를 작성하고 이 계획의 경제성을 검토했으며, 이를 계

기로 KIST와 포항제철 사이에는 공장의 가동에 따르는 기술적인 문제 해결

과 기타 지원에 대한 수탁연구 계약이 맺어졌다.

하지만 기초과학 연구는 KIST에서 상대적으로 배제되어, 응용과학기술

연구와 기초과학 연구 사이의 불균형이 과학정책의 새로운 문제점으로 등

장하게 되었다. 이런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소는 70년대초 한국의 과

학기술을 대표하는 연구소로 성장해서 훗날 한국 과학기술에 공헌을 하게

되는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연구경력을 쌓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1970년

대를 통해서 KIST의 각 연구실들은 계속 독립적인 정부출연연구소로 분가

해 나가게 된다.

-------------------------------------------------------------

60년대부터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


최형섭(崔亨燮): 1920년 경남 진주 출생. 일본 와세다대 이공학부 채광

야금과 졸업. 1955년 미국 노틀담 대학원 물리야금 석사. 1958년 미네소타

대 화학야금 박사. 1959년 국산자동차주식회사 부사장. 1962년 원자력연구

소장. 1966년 KIST 소장. 1971년 과학기술처 장관. 1977년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현재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 최형섭은 1962년 이래로 우리

나라의 주요 과학기술연구기관이 설립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

사한 인물이다.

그는 KIST의 설립을 주도했으며, 수많은 반대자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1971년부터 1978년까지 무려 7년 간 과학기술처 장관을 맡으면서 각종 정

부출연연구소와 교육기관을 한데 모아 대덕 연구학원단지를 만드는 데 핵심

적인 역할을 했다.


------------------------------------------------------------

50년대부터 국내에서 한국의 과학기술을 대변했던 과학기술자들


이량(李樑): 1937년 경성고공 졸업. 1941년 일본 도쿄 공대 졸업. 1946

년 서울대 공대 교수. 1953년 국방과학연구소장. 1954년 인하대 공대 교수.

미네소타대와 콜럼비아대 수료. 1953년 서울대 공학박사. 1960년 기계학회

장. 1963~69년 서울대 공대 학장.


성좌경(成佐慶): 1942년 일본 도쿄대 화공과 졸업.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유기화학과장. 1954년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

한양대 교수. 1964년 서울대 공학박사. 1966년 원자력연구소장. 인하대 공

대 학장 및 총장. 1973년 대한화학회장. 1976년 한국화학연구소장. 1979년

과학기술처 장관.


윤세원(尹世元): 1944년 일본 교토대 우주물리과 졸업.

1951년 서울대 조교수. 1959년 원자력연구소 원자로부장. 1961년 경희대

교수. 1970년 경희대 이학박사. 1974년 한국 물리학회장. 1991년 성화대 총

장.


조순탁(趙淳卓, 1925~1996): 1947년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1958년 미

국 미시간대에서 ‘고밀도 기체의 운동학적 이론’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1954~64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1964~74년 서강대 교수. 1972년 한국물리

학회장. 1974년 한국과학원장. 1983-90년 한양대 물리학과 교수.


장세헌(張世憲): 1946년 경성제국대 이공학부 화학과 졸업. 이어 서울

대 교수. 1958년 도미, 1960년 유타대에서 물리화학으로 박사. 1961년부터

정년퇴임시까지 서울대 교수로 재직. 1980년 대한화학회장.


최규원(崔圭源):1945년 도호쿠(東北)대 화학과 졸업. 1948년부터 서울대

에서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1955년 도미, 1959년 퍼듀대에서 물리화

학으로 박사. 1961년부터 정년 퇴임시까지 서울대 교수로 재직.



가을인데, 나는 가을보다 빠르게 겨울이다.


한국 현대 과학기술사[3] - 70년대

산업화와 맞물린 과학연구단지 조성기


1966년에 설립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는 70년대초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연구기관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KIST 자체는 산업체와의

계약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연구기관이었지 그 자체가 과학기술 인력을 배

출하기 위한 교육기관은 아니었다. 따라서 KIST는 우수한 과학기술 인력을

배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공계 대학원을 설립하고

그 교육기관의 운영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KIST 측

의 이런 계획은 국가 예산을 담당했던 경제기획원과 고등교육을 담당했던

문교부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1971년 과학 부흥의 일환으로 출범한 과학원

한편 1969년 새로운 이공계 대학원 설립안이 뉴욕대 공대 전기공학과 부

교수로 활동하던 정근모 박사에 의해서 마련되고 있었다. 당시 미국 국제

개발처(USAID)를 새로이 맡게 된 한나(John A. Hannah)는 미시간주립대학에

서 알게 된 정근모 박사에게 한국에서 새로운 이공계 대학원을 설립할 보

고서를 쓰도록 부탁했다. 정근모 박사의 보고서는 미국 국제개발처를 통해

서 한국 정부의 경제기획원에 알려졌고, 이에 따라 한국의 경제기획원과

과학기술처는 이 새로운 형태의 이공계 대학원의 설립을 검토하게 된다.

이 새로운 이공계 대학원 설립 계획에 대해서도 문교부는 강하게 반발했

다. 하지만 문교부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학교수 출신이던 남덕우

당시 재무부장관의 찬성 발언을 접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 새로운 형태의

이공계 대학원을 과학기술처 소관으로 추진하도록 지시했고, 이에 따라 당

시 과학기술처 장관이었던 김기형 박사가 설립사업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미국 국제개발처는 스탠포드대학 공대 학장과 수석 부총장을 지낸 바 있

던 터먼(Frederick E. Terman)과 베네딕(Donald Benedict) 등에게 이 새로

운 형태의 대학원인 ‘과학원’(the 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설립을 위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요청했다. 터먼은 1945년부터

스탠포드 공대 학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지방의 2류 대학에 불과했던 스탠

포드대학을 연방정부와의 적극적인 연결을 꾀함으로써 짧은 시간 내에 이

공계 명문대학으로 육성시켰던 사람이다.

그는 연방정부의 기금으로 물리학과 전자공학의 협동연구를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스탠포드대학 주변에 스탠포드 산업단지를 조성해서 쇼클

리 반도체 회사를 비롯한 많은 첨단기업을 이곳에 유치하는 등 산업체와의

협동연구를 진작시킴으로써 훗날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된

다. 이리하여 산업적 연구를 강조하는 터먼의 이념은 자연스럽게 부분적으

로 과학원 설립이념에 스며들게 되었다.

마침내 1971년 2월 16일 “산업발전을 위해서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분

야에 관한 심오한 이론과 실제적인 응용력을 갖춘 자를 양성하는 것”을

설립 목적으로 하고, 7개 학과, 9개 전공을 갖춘 특권적 과학교육기관인

과학원이 서울 홍릉에 설립되었다. 초대 과학원 원장에는 물리학자인 이상

수 박사가 임명되었고, 초대 부원장에는 과학원의 설립 초기부터 이 계획

에 깊이 관여했던 정근모 박사가 임명되었다. 설립 후 과학원은 입학자에

게 병역 면제 혜택을 부여한 특권적 지위를 충분히 이용해서 우수한 과학인

력을 모집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해외에서 우수한 과학인력을 적극 유치

해서 한국 과학기술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과학원(KAIS)은 서울대를 비롯한 기존 대학

의 연구를 자극하는 등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전문적인 과학기술연구 체

계가 정착하도록 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하지만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와 한국과학원은 기존의 원자력연구소와 대학에게 자극을 준 것이 아니라,

더 큰 좌절감을 주었는다는 부정적인 견해도 당시에는 심각하게 거론되었

다. 즉 정부가 기존 대학의 교육과 연구를 지원·육성하지 않고, 심지어는

기존의 원자력연구소를 축소시키면서까지 KIST와 KAIS를 특권적인 연구기

관으로 육성한 것은 국가 과학기술 정책을 둘러싼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킨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 새로운 전문과학기술기관의 설립 이후 1차적으로는 기존의 원자력연

구소가 급속도로 초기에 지녔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정부 지원의

손길을 얻지 못한 기존의 대학들은 과학원에 대해서 심한 거부감까지 나타

냈다. 특히 서울대 교수들이 지녔던 과학원에 대한 반감은 더욱 심했다(하

지만 최근에 들어와서 서울대 교수들이 70년대초에 자신들이 과학원에게

당했던 쓰라린 과거의 경험을 망각한 채로, 다른 국립대학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특별법을 제정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역사적 경험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대덕 단지를 조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던 최형섭 전과

기처장관은 이 새로운 연구학원단지를 조성하는 데 스탠포드대학의 터먼과

조지 허버트(George R. Herbert) 트라이앵글연구소장의 조언을 많이 받았

다.


수출전략의 드라이브 대덕연구단지


최형섭 과기처장관의 구상에 따라 1973년 마침내 대덕 연구학원 단지의

건설계획이 확정되었고, 중화학공업의 건설과 수출전략 산업의 구축을 위

한 연구개발을 담당할 5대 전략산업연구소의 설립이 추진된다.

1976년을 전후해서 기존의 국책 종합과학연구소였던 KIST의 여러 기능들

이 분화·독립되어 8개의 각 분야별로 전문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우선

1973년에 세워진 선박연구소는 잠시 동안 KIST의 부설로 있다가 1976년에

한국선박연구소로 독립해서 발족했다. 한국선박연구소에서는 유엔개발계획

(UNDP)의 자금 200만 달러를 들여서 선박연구의 기본이 되는 심수대형수조

를 건조하는 등 당시 부상하기 시작하던 한국의 조선공업을 지원할 본격적

인 연구시설도 갖추었다.

이외에도 1976년말에는 한국의 전자통신산업을 지원할 전자기술연구소

(KIET), 통신기술연구소(KTRI), 그리고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가 설립되

었다. 한편 1975년에는 중화학 공업의 발전에 바탕이 되는 계량·측정 기

술을 국제적 수준으로 향상시켜서 공산품의 국제적 신용도를 높이고 정밀

계측 표준과 기술을 보편화할 것을 목표로 하는 한국표준연구소가 설립되

었다. 또한 1976년에는 산업계에 화학 및 화학 기술에 관한 시험·연구·

조사·지원을 하고 그 성과를 보급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화학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이 화학연구소 역시 1978년 대덕 연구단지에 입주하여 1979년

부터는 본격적인 연구업적을 내기 시작했다.


재미 과학기술자 공동체의 출현

60년대를 통해서 전세계적으로 제3세계에서 선진국으로 빠져나가는 과학

기술 분야의 두뇌 유출(Brain Drain) 현상은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 발전

에 큰 저해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50년대와 60년

대를 통해서 진행된 두뇌 유출은 심각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6.25 전쟁이 끝난 뒤 많은 사람들이 유학을 떠나기 시작했으며, 1950년

대 중반 이후 미네소타 계획으로 심지어 대학교수들까지 유학의 길에 나서

기 시작했다. 우선 1955년부터 문교부 원자력과를 거쳐 원자력원이 설립된

후인 1964년까지 해외에 파견된 요원은 237명에 이르렀다. 이 당시에 외국

으로 나갔던 사람들은 주로 국비, IAEA 자금, ICA Colombo Plan 자금 및 기

타 외국 지원금에 의해서 유학의 길을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가운

데 상당수는 영원히 귀국하지 않거나 상당 기간 외국에 머물렀고, 일단 귀

국했더라도 다시 외국으로 나가는 일이 많았다.

이외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 사람들이 계속 증가해

서 60년대말에 이르면 재미 한국 과학기술자의 수가 2000~3000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리하여 미국에서 활동하는 과학기술자들과 국내 과

학자들 사이에 협조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는 의견이 한국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관련자들과 재미 과학자들 사이에서

대두되었던 것이다.

1968년 9월 오하이오주 콜롬부스에서 열린 한국 과학기술연구 심포지엄

에서 남가주 대학의 김영배 교수는 국내 과학자들과 재미 한국 과학자들

사이에 협조를 위한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기했다. 그 뒤 1971년 제2

대 과기처장관이 된 최형섭과 한국 물리학회 초대 미국지부장 이기억 박사

사이에 논의가 진행되었고, 그해 11월 중순 미국으로 건너온 과기처 김형기

연구조정관이 김순경 교수를 비롯한 여러 재미 과학자들과 협의한 결과 재

미 한국과학기술자협회가 창립되기에 이른다. 1971년 12월 11일 워싱턴

D.C. 윈저 파크 호텔에서 재미 과학기술자 69명이 참석한 가운데 재미 한

국과학기술자협회의 창립 발기인 대회가 열렸고, 초대 회장에는 김순경이

선출되었다. 이 재미 한국과학기술자협회는 비록 미국내의 한국인 과학기

술자들 전체의 적극적인 참여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1986년의 포항공과대학 설립을 비롯해서 한국의 과학

기술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

세계적인 재미 한국인 과학자


이휘소 (李輝昭, Benjamin Whiso Lee, 1935~1977)

이론 물리학자. 1935년 1월 1일 서울 태생.

1954년 도미하여 1956년 오하이오주의 마이애미대학을 졸업했다. 1960년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에이브러험 클라인(Abraham Klein)의 지도 아래 박

사학위를 받았고, 펜실베이니아대학과 프린스턴 고등연구원 연구원을 지냈

다. 1966년에는 양(C.N. Yang)의 초청으로 뉴욕주립대학(SUNY at Stoney

Brook)의 교수가 되었다.

1964년 이휘소와 그의 스승 클라인은 자발적 대칭 붕괴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서 미시세계에서의 질량의 존재를 규명하는 히그스 메커니즘 등장에

기여한다. 1971년과 1972년 사이에 프랑스에서 스토니 부룩을 방문한 프랑

스 과학자 장 진-쥐스탱(Jean Zinn-Justin)과 함께 자발적으로 붕괴되는

양자전기역학 이론이 재규격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서 히그스 메커니

즘과 자발적으로 붕괴되는 게이지 이론의 형성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1973년 페르미 입자가속기 연구소의 이론 물리학 부장을 지냈으며, 여기서

가야르(M.K. Gaillard), 로즈너(J.L. Rosner)와 함께 J/프사이 입자가 발견

되기 전에 참-쿼크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다.

1977년 6월 16일 시카고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42세의 젊은 나이

로 사망했다.



자유게시판

게시판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추천
702 대선후보들이 이공계를 실제로 우대하는 정책을 내놓게 하려면... 댓글 6 잘살고싶어 10-05 2948 1
열람중 [포항공대 임경순교수] 한국 현대과학기술사 로켓연구가 10-05 5348 1
700 교수님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댓글 1 지인기 10-05 3112 0
699 해외 고급인력 한국으로 U턴 댓글 18 tatsache 10-04 3676 1
698 [한겨레] 기자들이 금뺏지를 다는 방법 댓글 3 추풍령 10-04 4571 1
697 [전자신문] 이공계 졸업자 공무원 임용 확대 방안 사이버 공청회 개최 댓글 3 이공계2 10-04 3361 1
696 답변글 [re] 보다 많은 이공계사람들이 관심을가지고 들러보기를 바랍니다. 댓글 1 인과응보 10-04 2695 1
695 세상에 쓸모있는사람이란,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댓글 4 지인기 10-04 4009 4
694 답변글 [re] 세상에 쓸모있는사람이란,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댓글 4 백수 10-04 3315 1
693 답변글 [re] 세상에 쓸모있는사람이란,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댓글 5 소요유 10-04 3864 1
692 회원 여러분의 운영진 참여를 기다립니다 댓글 1 sysop 09-30 6466 47
691 [매경]나! 사이언티스트 (25) 류성언 생명공학硏박사 댓글 18 Myth 10-03 5120 8
690 궁금합니다~삼성전자서비스센터~ 댓글 1 지인기 10-03 3917 1
689 '그 교수가 수업시간에 해준 얘기'에 대하여... 댓글 10 임호랑 10-02 3630 3
688 BK사업 200억 헛돈-…서울대 2곳 등 6개 사업단 탈락 - 국민일보 댓글 8 인과응보 10-02 3476 1
687 이공계 문제와 장인정신 댓글 2 최동진 10-02 2906 1
686 언제쯤이나.. 댓글 3 준형 10-02 2962 2
685 교수가 과연 필요한 존재인가? 댓글 8 SoC 10-01 3147 1
684 대학과 기업의 화해의 길은 없을까요? 댓글 10 백수 10-01 2835 1
683 동아일보 기사 댓글 10 아햏ᕛ… 10-01 3768 0


랜덤글로 점프
과학기술인이 한국의 미래를 만듭니다.
© 2002 - 2015 scieng.net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