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일론 발명과 화학자 캐러더즈"...

글쓴이
최성우
등록일
2002-12-09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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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한 과학자들(1) - 나일론의 발명자 캐러더즈

최성우 (과학평론가; hermes21@nownuri.net)
- '과학사 X파일(사이언스북스)' 中에서 -


어떤 이유에서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인류 역사의 여러 방면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 중에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비운의 화가 고호, 세기적 문호 헤밍웨이 등 문화, 예술 방면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던 이들도 있고, 히틀러와 같은 실패한 정치가도 있고 그밖에도 많은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사에 있어서도 자살한 사람들의 경우가 결코 적지 않다. 그 원인으로는 과학자의 경우 연구상의 좌절이나 위기, 기술자나 발명가의 경우에는 사업화의 실패등 자신의 일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고, 가정사나 다른 개인적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과학기술자들 중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중요한 인물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이들 몇몇의 경우를 살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듯하다.

1938년 9월21일, 미국의 유명한 화학회사 뒤퐁(Du Pont)은 '나일론(Nylon)'이라는 새로운 섬유의 발명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신문들은 '석탄과 공기와 물로 만든 섬유', '거미줄보다도 가늘고 강철보다 질긴 기적의 실'로 불리는 나일론의 탄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에는 명주도, 식물성재질도 아닌 석탄, 물, 공기 따위로 어떻게 섬유룰 만들 수 있느냐고 '엉터리'임이 틀림없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고, 그래도 세계 굴지의 화학회사인 뒤퐁과 신문사들이 아무 근거없는 이야기를 했겠느냐고 하면서도 의아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제품을 하루 빨리 보고 싶다는 사람들의 열망으로 인하여 나일론 견본은 세계 여러 나라로 보내 졌고, 각국의 과학자들은 인공섬유 나일론을 분석한 후 그 우수성에 감탄하였으며, 관련업자들은 발빠르게 나일론 제품의 판매를 서두른 결과 나일론은 전세계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1939년의 뉴욕 만국박람회에서 나일론은 가장 인기있는 품목이었고, 1940년 5월, 뉴욕에서 여성용 나일론 스타킹의 판매가 시작되자 많은 여성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어 스타킹을 사고서 치마를 걷어 붙이고 그 자리에서 신어 보았다고 한다. 값싸고 질 좋은 나일론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만 했다.
그러나, 정작 이 제품의 개발자 캐러더즈(Wallace Hume Carothers; 1896-1937)는 자신의 발명품이 날개 돋힌듯 성황을 이루는 행복한 장면을 볼 수가 없었고, 그로 인한 부와 명성도 누리지 못했다. 캐러더즈 박사는 뒤퐁사가 나일론의 발명을 발표하기 전해인 1937년 4월,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자살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캐러더즈는 1896년 4월, 미국 아이오와 주의 벌링턴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 났다. 아버지는 상업학교의 선생으로서, 아들이 좋은 직업을 얻도록 상과대학에 들어 가도록 하였고, 캐러더즈는 열심히 공부하여 남들보다 일찍 졸업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소원은 수학이나 과학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주리 주 타키오 대학에서 상학부 조교를 하면서 화학을 공부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고, 일리노이 대학에서 유기화합물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하버드 대학에서 천연섬유 등의 고분자 구조에 관해 연구하였다. 대학에서 그는 '매우 탁월한 유기화학자'라는 평을 들었으나, 한정된 예산으로 인하여 당시로서는 매우 새로운 분야인 고분자이론에 관한 연구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의 스승은 캐러더즈를 뒤퐁사의 중앙연구소에 추천하였고, 그도 역시 세계 굴지의 화학회사인 뒤퐁사에서 충분한 연구비와 풍부한 기자재를 지원 받아서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였다.
1928년 뒤퐁사에 입사한 그는 이듬해에 중앙연구소의 기초과학 연구부장이 되어서 고분자 연구를 주도하였고, 1929년에는 세계적으로 대공황이 닥쳐 왔으나, 도리어 뒤퐁사는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기초연구와 그에 기반한 신제품 개발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하고, 캐러더즈에게 충분한 연구인력과 설비를 지원하였다. 덕분에 그는 회사의 사장, 중역 등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풍부한 연구비를 지원 받으면서, 분자량이 작은 물질을 연결해 고분자를 만드는 '고분자 중합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천연고무보다 우수한 물성을 지닌 합성고무 네오프렌의 발명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의 연구팀은 고분자 연구를 계속하던 중, 연구원 중의 한명인 줄리언 힐(Julian Hill)이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하였다. 그는 실패한 찌꺼기를 씻어 내다가, 불을 쬐어 본 결과, 찌꺼기가 게속 늘어나서 실 같은 물질이 되었다. 이것을 본 캐러더즈는 합성섬유의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고, 1935년에 마침내 합성섬유로 적합한 폴리아미드를 발견하여 나일론의 시제품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세계 최초의 합성섬유를 '폴리머 6-6'이라 명명하였고, 이것을 상품화하기 위해 뒤퐁사는 230명의 화학자를 포함하는 대규모의 연구개발 인력과 시설을 총동원하였다. 기초연구의 성공을 본격적인 상품화로 연결시키는, 오늘날의 전형적인 R&D(연구개발) 방식이 이때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상품화 및 양산 공정을 위한 몇가지 난제를 해결한 뒤퐁사는 1938년, 나일론을 공식적으로 세상에 선보였고, 석탄과 물과 공기에서 만들어진다는 '이상한 섬유' 나일론은 양말, 의류, 로프 등으로 급속히 보급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낙하산의 제조에 주로 이용되었다.

나일론의 발명에 힘입어, 인류는 의복의 재료를 면화, 비단, 모피 등의 자연물 뿐만 아니라, 대량생산되는 인공합성물로부터도 값싸게 얻을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이것은 민간기업의 대규모 연구개발능력이 신제품 개발에 대성공을 거둔 최초의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캐러더즈 박사의 탁월한 능력 못지 않게, 자유로운 기초 연구를 보장하고 연구비와 인력, 설비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뒤퐁사 경영진의 방침이 없었더라면, 나일론은 세상에 나오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발명자인 캐러더즈 박사가 성공을 거두고서도 왜 자살을 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나일론의 상품화 과정에서 주도권을 빼앗긴 것이 한 원인이었다는 설도 있고, 러시아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매우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고도 한다. 캐러더즈는 자신의 발명품이 세상에서 큰 빛을 발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41세의 아까운 나이로 스스로 삶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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