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쌀과 보신탕"...

글쓴이
최성우
등록일
2002-09-03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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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식약청에서 '죽염'에 대해 뭔가 얘기를 해 놓고 구체적인 상세 결과들은 발표하질 않아서 도리어 의혹과 혼선만 증폭되고 있는데... (자유게시판에도 관련 글이 올라와 있더군요...) 그런데 관계 당국의 어쩡쩡한 태도와 무조건 덮기에 급급한 모습으로 문제가 생긴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요.
아래 글은 몇년 전에 통신공간에 올렸다가, '수돗물 바이러스 파동'이 한창이던 작년 5월에 한겨레신문 과학칼럼(21세기를 여는 열쇠)에도 짧은 요약본을 냈던 글인데, 다시 좀 고친 것을 참고로 첨부합니다. 이번 건은 아래에서 제가 거론한 사례들과는 약간 경우가 다른 듯도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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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과 보신탕"

최성우(과학평론가; hermes21@nownuri.net)
- '상상은 미래를 부른다'(사이언스북스) 中 에서 -

우리가 일상적으로 섭취하거나 이용하는 여러 식품, 의약품, 생활용품 등에서 인체에 해로운 특정 성분이 검출되었거나, 그러한 의혹이 짙다는 언론보도를 가끔씩 접하게 된다. 그런데, 그 때마다 학계나 민간단체의 보고내용은 상당한 우려를 담고 있는 반면에, 정부당국의 공식 발표는 '별 문제가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묘하게도 어떤 사안이던 간에 항상 일치한다.

몇 년 전에는 유아용 장남감, 플라스틱 식기, 각종 일회용품 등에서 남성의 생식능력을 저하시키는 이른바 '환경호르몬'으로 불리는 내분비계 교란물질이 검출될 가능성이 있다는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당시 관계당국은 컵라면 용기에서 내분비계 교란물질로 의심되는 특정 성분이 검출된 바 없다고 발표했고, 당시 필자는 과거 관계당국의 행태로 볼 때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글을 어느 통신공간에 올렸던 적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며칠 후 국내 대학의 연구소에서 용출실험을 한 결과, 당국의 검사에서는 전혀 검출된 바 없다던 문제의 성분들이 검출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제발 이번에는 틀리기를 바라던 필자의 예상이 다시 한번 '적중'하게 되어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되풀이될 때마다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 비전문가인 필자로서는 확언할 수 없다. 또한 식품이나 의약품, 관련제품 등에 있어서는, 관련되는 화학물질의 종류도 엄청나게 방대할 것이고 변수 등도 너무 많아서 정확한 분석이 이루어지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을 것이다. 특히 인체에 대한 영향 등을 명확히 입증해 내기란, 연구형편 및 지금의 과학기술 수준에서 때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문제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시험과 분석의 방법, 과정 및 내용 등을 솔직하게 공개하고 관련 전문가들과의 토론과 협력을 통해 보다 나은 결과를 구하는 것이 책임 있는 당국의 태도가 아닐까? 한술 더 떠서, 객관적이고 공정해야할 조사결과가 정부당국의 정책적 목적이나 업계의 이해관계에 따라 춤을 추는 한심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 큰 문제이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쌀에 대한 영양학적 평가'가 시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 사례이다.

1970년대에는 쌀의 국내생산량이 부족하여 쌀자급을 이루지 못하는 형편이었고, 이에 따라서 보리혼식, 분식 등이 장려되는 상황이었다. 당시의 신문, 방송 매체 등에서는 가끔씩 쌀의 영양 평가에 대한 전문가들의 분석이 나왔는데, 결론은 한결같이 부정적인 쪽이었다. "보리가 영양적인 면에서 훨씬 우수하다"느니, "흰 쌀밥만 먹으면 각기병, 고혈압, 당뇨병 등의 온갖 성인병에 걸릴 가능성이 크다" 느니 하는 주장들이 자주 들렸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 상황은 바뀌어서 쌀의 소비는 해마다 줄어든 반면, 연속적인 벼농사 대풍으로 쌀 생산량은 크게 늘어서 쌀의 자급을 이룬 것은 물론, 도리어 쌀이 크게 남아 돌아서 그 처리를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쌀막걸리, 쌀과자, 쌀국수 등으로 쌀의 소비를 촉진하는 것으로는 모자랐는지, 신문, 방송마다 '쌀의 영양학적 우수성'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와 연구발표들이 줄을 이었다. 전의 '성인병 유발' 운운하던 주장은 눈 씻고 찾아보아도 물론 없었다. 불과 십년 사이에 쌀의 형질이 그토록 우수하게 변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체질이 갑자기 바뀐 것인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1996년 무렵인가, 우리나라가 월드컵 유치를 앞두고서 '보신탕'이 외국인 혐오식품으로 부각되어 1988년 올림픽 당시처럼 또 한 차례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다시 개고기에 대한 찬, 반 양론이 갈리고 논쟁이 오가면서, 이번에도 보신탕이 사철탕, 영양탕 등으로 '창씨개명'을 당하고 사대문 밖으로 쫓겨나는가 했는데, 갑자기 터져 나온 것이 "보신탕에서 인체에 치명적인 균이 발견되었다."는 당국의 발표였다.
무슨 균이었는지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 균은 이전에는 없었다가 '때맞춰서(?)' 갑자기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이전에는 관계당국의 시험기술이 부족해서 발견을 못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필자가 너무 과민한 탓에 이런 의혹을 품었던 것일까?
꼭 식품, 의약 관련 분야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은데, 과거에 원자력 발전소 주변의 환경이나 안전문제 등에 관한 의혹이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한전당국과 옛 과학기술처는 "원자력 발전은 100% 안전하다"는 답변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곤 했다

고의적으로 당국에 대해 불신풍조를 조장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거니와, 국민들의 불필요한 불안이나 오해를 불식시키려는 당국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민감한 사안들을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처리하지 않고 무조건 덮기만 하려는 비밀주의와 권위주의는 나중에 더 큰 화를 자초할 가능성이 크다. 최근 세계적으로 피해와 공포를 몰고 온 '광우병' 역시 처음에 영국 정부가 언론과 대중에게 미칠 파문을 우려하여 광우병에 관한 정보 공개를 꺼린 결과, 광우병을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채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은 우리도 되새겨 보아야할 값비싼 교훈이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을 가래로도 못 막게 된다'는 속담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얘기일 것이다.

최근에는 정수장의 수돗물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환경부의 조사결과가 나와서 큰 충격을 준 바 있다. 그런데 그보다 4년 전부터 수돗물의 바이러스 오염 문제를 제기한 대학교수의 주장을 그간 당국이 거의 묵살한 채 적극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위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고발까지 했었다는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다.
최근에는 정부당국의 문제 접근이나 해결 방식도 과거의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비하면 한결 나아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학계나 민간단체의 정당한 문제제기를 수용하는데 인색함으로 인하여 함께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강구해야 할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흘려버리는 악습을 되풀이하곤 한다.
권위적인 비밀주의는 정부당국을 '양치기소년'으로 만들어 도리어 권위를 손상시키게 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나중에 국민들에게 더 큰 불신과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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