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과학기술과의 만남"

글쓴이
최성우
등록일
2002-09-19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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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 동해선 철도와 도로가 연결되고 부산 아시안게임에 북한 선수들이 참가하는 등, (아직 너무 낙관만은 할 수는 없지만) 남북한 간의 교류와 화합 분위기가 다시 회복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남북한 간의 교류를 활성화하고 향후 통일에 대비해야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이 문제에 관해 이번 국정감사에서 질의한 의원도 있고 우리 회원 중에서도 언급하신 분도 있는데...)
아래 글은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직전이던 2000년 6월 초에 제가 한겨레신문 과학칼럼(21세기를 여는 열쇠)에 썼던 글을 많이 고치고 보완한 것인데, 당시만 해도 언론지상에 남북간의 스포츠 교류, 문화교류, 기타 학술교류를 확대하자는 얘기는 많아도 '과학기술교류'를 활성화하자는 얘기들은 거의 없더군요...
우리 회원분들도 다양한 과학기술 분야에 걸쳐서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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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과학기술과의 만남

최성우 (과학평론가; hermes21@nownuri.net)
- '상상은 미래를 부른다(사이언스북스)' 中에서 -


지난 2000년 6월의 역사적인 남북정상 회담을 계기로 하여 남북간의 문화교류, 경제교류 등 각 분야의 협력과 교류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에 못지 않게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남북간의 지속적인 교류, 협력을 증진시키고, 통일 이후의 남북한 과학기술의 통합도 서서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북한 과학기술의 특징 및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북한 과학기술의 토대 마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집단으로서 월북 과학자들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해방 직후 형편이 열악하고 과학인력이 매우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었던 북한 과학기술계에서, 대학교수, 연구소 책임자 등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면서 이후 북한과학계를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남북한 최초의 공과대학이라 볼 수 있는 흥남공업대학이 월북 과학기술자들을 중심으로 설립되었고, 1952년 북한 최대의 연구기관인 과학원이 창설될 때에도 여러 월북과학자들이 관계되었다.
북한 과학기술의 독특한 특징을 이해하는 데에는 역시 사회주의 국가로서 사상이념,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영향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옛소련에서 일찍부터 격렬한 과학과 철학논쟁이 벌어지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정치적 파고에 휩싸이는가 하면, 중국에서도 이른바 '전홍(專紅)의 교차'로 일컬어지는 지배이념의 변화에 따라 과학기술이 큰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북한의 과학기술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고 하겠다.

특히 이른바 '주체 과학기술'로 불리는 북한의 과학기술체제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특징과 나름의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옛소련의 영향으로 기초과학 분야가 중시되었으나 이후에는 응용과학과 산업기술이 중시되는 방향으로 변화를 겪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심지어는 생산현장에서 수행되는 현지 과학연구가 주장되고 과학기술의 성과는 관찰이나 실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제 생산을 통해서 검증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또한 외부와의 교류보다는 자체 내부의 역량에 의존하는 이른바 '자력갱생' 모델도 북한 과학기술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이 역시 사상이념에 의한 영향으로 볼 수 있는데, 최근에는 러시아 등과 과학기술 협력에 큰 힘을 쏟고 있으나, 오랫동안 서방 선진국들과의 과학기술 교류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과학기술이 사상이념 및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과도하게 좌우됨에 따라, 북한의 과학기술은 전반적인 발전에 상당한 제약을 받고 왜곡된 형태가 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북한만큼 과학기술 및 과학기술자들을 중요하게 여긴 나라도 드물다. 해방 직후 월북과학자들을 크게 우대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이공계대학과 연구기관들을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과학기술자들은 상당수가 높은 명성과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과학기술계 기술관료, 즉 테크노크라트들은 국가의 주요 공장과 연구기관을 책임지고 있을 뿐 아니라 내각의 많은 부서들을 담당하는 등, 북한 핵심 권력층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엘리트 집단이다.
또한 북한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뛰어난 과학자도 몇몇 배출하는 등, 만만치 않은 과학기술 저력을 보여왔다. 그 중에서도 리승기와 김봉한은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북한 과학기술체제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과학자들이다.

몇 년 전 사망한 리승기 박사는 화학섬유 '비날론'의 발명자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화학자로서, 오랫동안 북한 과학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월북과학자의 한사람으로서 일제시대 말엽에 교토제국대학에서 이미 새로운 합성섬유를 발견한 바 있는 그는, 비날론의 실용화 연구 및 공업적 생산에도 크게 기여하여 제1회 과학부문 인민상을 수상하고 노력영웅 칭호까지 받는 등 북한 최고의 과학자로 떠오르게 된다. 또한 비날론은 한국의 전통 섬유인 무명과 특성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북한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석탄과 석회석을 원료로 사용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독자성과 자립성을 강조하던 당시 북한 당국의 입장과도 잘 부합하여 국내외적으로 널리 선전되었다.
한의학자 김봉한은 1960년대에 인체의 경락에 관해 독특한 해석을 한 이른바 '봉한학설'을 주장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고 한때 노벨생리의학상 후보로까지 거론된 적도 있다. 이 학설은 민족의학으로서 한의학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또한 서양의학과의 통합적인 접근을 시도하던 배경에서 이루어진 연구의 하나로서, 경락이란 조직이나 기관과는 독립되어 인체에 실재로 존재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봉한학설이 큰 관심을 끌게 된 데에는 과학적인 측면보다는 사상이념적, 정치적 측면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나, 이 이론은 첨단장비와 실험을 동원하여 더욱 방대하고 획기적인 주장을 담게 되었는데, 북한 당국을 이를 생물학사상 혁명적인 업적으로 간주하여 전세계에 널리 선전하였다. 아울러 봉한학설은 북한 과학이 낳은 세계적인 업적일 뿐 아니라, 그 기반이 되어 온 사상이념의 성공을 입증하는 것으로도 여겨졌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 하에서 북한의 과학기술은 나름의 자립성과 독창성을 지니고 있고 사회의 다른 여러 부문과도 긴밀한 관련을 가지게 되었으나, 외부의 시각에서 보면 석탄화학산업, 국방 연구 등 몇몇 분야에서만 기형적인 발전을 보였을 뿐 전반적인 과학기술 수준은 낙후되어 있으며 때로는 지나친 실용성만을 강조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는 평가도 내릴 수 있다.
최근 들어 북한 당국은 과학기술개발을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중대사로 간주하면서 1999년을 '과학의 해'로 지정했고 2000년대 들어서도 강성대국 건설의 기본지표로서 과학기술의 발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여러 첨단과학기술 분야에도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하는 등 과학기술 예산을 증액하였고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대우 역시 더욱 높아졌으며,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서도 과학기술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하다.

오랜 세월동안 단절된 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온 남북한의 과학기술 간에 활발한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지고 차츰 잘 결합해 나아간다면, 상호 보완적인 구실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농업기술 분야, 컴퓨터 및 정보기술 분야 등 몇몇 분야에서 민간 차원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고 정부당국도 남북간의 과학기술 비교연구 및 교류방안을 마련하고 있는데, 장기적인 안목에서 체계적인 협력을 위해서는 북한 과학기술체제를 심층적으로 연구함과 아울러 일반 과학기술자들도 북한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높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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